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멋진 일은 가족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딸이 봐도 엄마는 깐깐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그게 가끔은 숨 막히고 답답할 때도 있다. 다른 엄마들은 자녀가 청소년쯤 되면 알면서도 대충 속아주기도 하는데, 엄마는 도대체 그런 구석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아빠는 그럴 때마다 엄마 몰래 딸을 도닥이면 말한다.

   “네가 엄마를 이해해라. 엄마가 나쁜 뜻으로 그러는 거 아니잖니? 그리고 엄마만큼 제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드물단다. 물론 너무 빡빡한 건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마 아니니? 우리 가족이 지지하지 않으면 엄마는 무너질지도 몰라.”

   어린 딸은 아빠의 말을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딸도 엄마가 틀린 말 하지 않고 허튼 일 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왜 다른 엄마들처럼 따뜻하지 못한지, 그리고 가족이 지지하지 않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어쩌면 동화책에서 읽었던 계모거나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가끔 사소한 일로 남들과 불편한 일을 겪기도 해 딸은 그것도 싫었다. 한번은 반상회에서 관리비를 과다하게 징수한 것을 돌려받게 되었는데, 그걸로 한 해 동안 수고한 아파트 층 대표들 관광이나 다녀오게 하자고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들 그러자고 동의했는데 엄마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과다 징수된 돈은 주민의 몫인 만큼 당연히 각 가정에 골고루 돌려줘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겉으로는 동의를 구하는 듯했지만, 사실 자기들끼리 미리 합의한 뒤 실제는 일방적 통고와 마찬가지인 건 절차상 잘못되었다고 따졌던 모양이다.

   미리 안건을 마련한 사람들이나 거기에 동의해준 사람들로서는 계면쩍고 불편했을 것이다. 그 뒤부터 층 대표 아주머니들은 엄마를 노골적으로 멀리했다. 그 돈을 돌려받은 주민들도 내심 좋아하면서도 엄마의 그 까칠함에 대한 약간 왜곡된 소문 때문에 은근히 거리를 두는 눈치였다.

   과다 징수된 관리비를 돌려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엄마 덕분이었다. 관행적으로 외부에 용역을 주었던 일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따지며 다른 아파트 관리비와 세밀하고 비교해서 문제를 제기했고, 많은 세대들이 공감하며,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사는 회계사 아저씨와 그런 면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아저씨가 도와줘서 부풀려진 비용을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걸 층 대표 아줌마들 관광비용으로 쓰자고 했으니 엄마로서는 당연히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수고한 건 인정하지만 주민들의 자발적 의사가 아니라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엄마에겐 미운털이 박힌 게 분명했다.

   딸은 엄마가 왜 그런 비난과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답답했다. 남들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면 넘길 수도 있는 걸 왜 그렇게 원리 원칙만 따지는지. 다른 아줌마들이 자신까지 예전처럼 살갑게 대하지 않은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엄마가 야속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딸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같은 아파트 아주머니 몇 분이 앞에 가면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

   “성희 엄마, 그거 알아?”

   “뭐?”

   “805호 윤희 엄마랑 아빠. 결혼도 안 하고 동거부터 한 거래.”

   “그래? 남들한테는 원칙 따지며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정작 자기는 그게 뭐래.”

   딸은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혹시라도 그 아주머니들이 자기가 뒤에 있는 걸 알아챌까봐 일부러 얼른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가슴은 두방망이질 치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은 동네 공원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갔다. 엄마가 반갑게 맞아주는데도 대답도 하지 않고 쌀쌀맞게 제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따라 들어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시큰둥하게 아무 일 없다고만 대답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깜짝 놀라 까닭을 묻는 엄마에게 딸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 그런데 그런 엄마가 동거했다며! 엄만 위선적이야. 난 이제 창피해서 이 아파트에 못 살아!”

   순간, 충격을 받은 엄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다가 울고 있는 딸과 하얗게 질려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아빠는 빙긋이 웃었다. 그 충격적 ‘폭로와 비난’에 전전긍긍해야 할 당사자인 아빠가 펄펄 뛰기는커녕 웃다니! 딸은 그런 아빠도 야속했다. 적어도 아빠는 언제나 자기편인 줄 알았는데.

   “우리 윤희가 쓸데없는 사람들의 허튼소리에 마음이 상했구나.”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딸은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너무나 복잡하고 충격적이어서 혼돈스러울 뿐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남들처럼 축복받는 결혼식은 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란다. 아빠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젊은이였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런 아빠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반대하셨단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했고, 결국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르지도 못했어.”

   아빠는 엄마에게 미안한 눈길을 보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겠니. 그래도 엄마는 용감하게 아빠를 선택했어. 그래서 아빠는 엄마에게 평생 고마움을 간직하고 산단다. 반대한 결혼이었으니 남들처럼 경제적인 도움도 전혀 받지 못했어. 그저 아빠가 총각 시절 쓰던 낡은 TV 하나와 밥상, 그리고 밥그릇 두 개, 냄비와 밥솥 하나, 수저 두 벌이 살림의 전부였어. 남들은 웨딩드레스 입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 멋지게 해외로 신혼여행도 다녀오고 하는데, 그렇게 비참하고 남루하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거야. 게다가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있었지.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래도 엄마는 그걸 의연하게 이겨냈어. 엄마는 정마 용감한 사람이야. 아빠는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고 고맙단다. 윤희가 속상해하는 거 이해한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부끄러울 것도 없고 당당해. 그러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울 필요는 없겠지?”

   딸은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엄마에게 상처를 준 것이 못내 미안했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엄마, 미안해. 나 너무 나쁜 딸이지? 하지만 엄마, 사랑해. 그리고 자랑스러워.”

   딸ㄹ은 엄마에게 안겼다. 엄마도 딸을 덥석 안았다.

   “엄마도 우리 윤희 사랑해.”

   엄마는 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여름의 늦은 해거름은 창가를 발갛게 물들였다.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는 신선한 바람까지 행복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