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은
자주 찾아오는 친구들이다


    한 주가 지나면 일 년 중 가장 바쁘게 뛰어야만 하는 추석 밑이다. 한기택 씨는 벌써부터 마음이 조급하다. 꼭두새벽부터 배달을 하기 시작해서 해 떨어진 한참 뒤에야 겨우 하루의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힘들게 열심히 일한 만큼 수입이 생기니 마다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사실 ‘날마다 한가위만 같아라’가 아니라 ‘날마다 한가위 열흘 전만 같아라’를 노래하고 싶을 정도다.

   퀵서비스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들다. 배달 건수만큼 수입도 커지기 때문에 잠시도 머뭇거리거나 쉴 틈이 없다. 그래서 한창 바쁠 때는 일부러 물도 마시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아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 탈수증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는데도 물을 마시지 않는 버릇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그리도 차들이 쌩쌩 달리는지, 예전에 자신이 운전할 때는 오토바이들이 곡예 운전하는 게 영 못마땅했는데, 막상 자신이 오토바이를 몰고 큰길로 나가보니 모든 자동차들이 자신을 향해 으르렁대는 것만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이제는 벌써 3년의 경험이 쌓이다 보니 시내의 어지간한 길은 눈을 감아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고, 어디가 지름길인지 훤히 꿰뚫게 되었다. 여전히 힘은 들지만 그래도 자신이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가 아주 모범적인 퀵서비스맨이라고 칭찬 반 비아냥 반 일컫는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든지 헬멧을 쓰고 다니기 때문이다. 젊은 친구들 가운데 일부러 헬멧을 쓰지 않고 멋 부리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사무실에 들어가 수신인을 찾는 경우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헬멧을 꼭 쓰고 다닌다.

   그가 헬멧을 벗지 않는 데는 다 까닭이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는 꽤 알찬 기업을 운영하던 사장이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다른 기업을 인수해서 더 큰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생산 원가가 급등하고 판로는 막히고 설상가상으로 은행 빚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고 말았다.

   그 위기가 오래갈 것을 예상했더라면 일찌감치 기업 하나를 매각해서 견뎠을 텐데, 한 번도 긴축 경영을 경험하지 못했고 외환 파동은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서 미적미적하며 곧 풀리겠지 여기고 끌어온 미련이 일을 망쳤다. 게다가 경리 일을 맡았던 친척 동생이 회사의 자금을 횡령해 잠적하는 바람에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고 부도를 맞았다. 일찌감치 손 털었더라면 원금이라도 건졌을 텐데 결국 자신이 일궈낸 회사는 헐값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나마 큰 빚 떠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형편이었다.

   이후 그는 몇 달 동안 술에 빠져 살았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서 울분이 쌓이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가 외동딸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으니 딸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집에 들어가는 일도 두려워졌다. 실제로 서울역에서 한 일주일 지낸 적도 있다. 그런데 그의 휴대전화에 있는 딸의 모습과, 무수하게 찍힌 딸과 아내의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보면서 결코 그대로 무너져 삶을 마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땅히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다행히 함께 노숙하던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퀵서비스 일을 나가면서 그를 데리고 갔던 게 일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오토바이가 없으니 회사 오토바이를 빌려서 비용을 제하고 일했다. 처음에는 죽어라 고생만 하고 돈은 별로 만져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딸은 잘못된 길로 새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딸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쉬지 않고 뛰었다.

   “아빠, 엄마, 고마워요. 내 친구 아빠는 실직하고 엄마와 싸워서 결국 이혼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엄마와 아빠는 이렇게 열심히 살잖아.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 사랑해요. 그리고 자랑스러워요.”

   퀵서비스 일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일이라서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힘들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딸이 보내준 문자만 봐도 힘이 났다. 아빠, 너무 미리하지 말아요. 곧 내가 아빠 행복하게 해줄게. 사랑해요. 아빠! 전직 사장 한기택 씨는 아내와 딸의 응원이 늘 고맙고 미안해 정말 뼈가 으스러져라 일했다.

   그래도 남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는 긴장하게 된다. 혹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럴 때면 얼굴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는 헬멧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래서 한기택 씨가 결코 헬멧을 벗지 않는 것이다.

   추석 대목이 시작되기 전 한기택 씨는 일요일에 고향에 다녀오기로 했다. 추석 때 가면 친척이며 친구들 얼굴을 피할 수 없으니 일찌감치 내려가 성묘하고 올 심산이었다. 벌써 네 해째 추석이나 설을 피해 성묘하고 왔다.

   이른 새벽에 출발한 덕에 다행히 한적한 시간에 여유 있게 아버지의 미ㅛ에 다다랐다. 처음에는 무성하게 자란 무덤의 풀을 보고 얼마나 송구하고 부끄러웠는지 펑펑 울고 왔다. 그 다음 해부터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형편이라 예초기는 엄두도 못 내고 배낭에 낫을 담아 갔는데, 무슨 일인지 묘가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게 벌써 3년째다.

   이번에도 그가 가져간 낫을 쓸 일이 없었다. 참 해괴한 일이었다. 누구에게 부탁한 적도 없고, 자신 대신 벌초해 줄 만한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그가 혹시 사람들 눈에 뜨일세라 조심스럽게 성모를 마치고 언덕을 막 내려올 때였다. 누군가 솔밭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언뜻 눈에 띄었다. 그래서 옆길로 돌아가려는데 그쪽에서도 그가 피하려는 낌새를 눈치 친 모양인지 화급하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기택아, 내다. 철웅이 모르겠나?”

   고향에 사는 그의 중학교 친구였다.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반갑게 인사하기도 민망한 순간이었다. 친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부지한테 인사는 드렸노? 니 올라가는 걸 보고 천천히 올라왔다. 우리 집에 가서 밥이나 묵자. 마누라한테 점심 준비해라 했다. 그리고 니 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말라꼬 당부해뒀으니 걱정 말고 내려가자. 울 마누라 입은 무겁데이.”

   알고 보니 지금까지 자기 대신 벌초한 게 바로 그 친구였다.

   “마누라가 그러더라꼬. 아무래도 니가 추석 보름 전쯤에 성묘하러 온 것 같더라고. 니가 아부지 산소에 풀이 무성한 거 보고 얼매나 쏙이 마팠을까 싶어서 미안터라. 내가 무심해서 어르신 산소 벌초도 안 했다 싶어서 부끄러버서.”

   “일마야, 아들도 명절에 성묘도 오지 몬하고 벌초도 몬하는데, 니가 그 일을 몬했다꼬 미안코 부끄러버할 일이 어데 있노?”

   막걸리 한 사발을 넘긴 한기택 씨가 고마움을 애써 감추려 오히려 친구를 타박했다.

   “아이다. 느그 아부지가 내게 을매나 잘해주셨노. 울 어매 아플 때 일부러 찾아오셔서 약을 놓고 가시면서 비싼 쇠고기 한 근까지 안 끊어주셨나. 내는 어르신 몬 잊는다. 그런데 니 없다꼬 나 몰라라 했다. 미안타.”

   한기택 씨의 아버지는 약사였다. 마음 너그러웠던 그분은 아들 친구 어머니가 아픈데 돈이 없어 약도 제대로 못 쓴다는 말을 듣고, 한 걸음에 약을 짓고 푸줏간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서 주셨던 모양이다. 그런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거의 모두 쏟아 부었던 사업에 실패한 뒤에, 여기저기서 자식 농사 잘못 졌다고 쑥덕대는 것만 같아 남들 눈 피해 성묘를 다녔는데······.

   자신의 부모 산소 벌초하기 전에 미리 친구 아버지 산소 벌초를 해준 친구 때문에 기택 씨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기택아, 사는기 별거 있나. 좋을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는 기라. 니 속사정을 어찌 촌에 사는 내가 알겠노. 하지만 잊지 않고 이렇게 아부지 찾아오는 니가 내는 고맙데이. 남들이 뭐캐싸도 신경 쓰지 말그라. 남의 사정 모르는 것들이 다 글케 입 나물대는 기다. 변명할 것도 없고 니만 신경 쓰그래이. 니 잘나갈 때처럼 다시 일어서면 되는 기라. 그때 가면 말 안 해도 다 고개 숙일끼라.”

   친구가 그날쯤 올 거라고 짐작한 철웅 씨가 일찌감치 벌초도 해놓고 술상까지 마련했다는 걸 알게 된 기택 씨는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며칠을 그렇게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철웅아, 고맙다. 내가 부끄러버 할 말도 없데이. 하지만 이 우정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끼다. 내년 설에는 내가 와서 벌초도 하고 명절 맞춰 딸내미 데불고 내려 오꾸마.”

   “벌초는 내가 미리 해노꾸마. 걱정하지 마라. 느그 아부지는 내 아부지나 마찬가지 아이가. 내도 어르신께 뒤늦게라도 보답할 수 있게 해도고.”

   기택 씨는 끝까지 눈물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저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기택 씨는 오늘도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누비고 다닌다. 그러나 이제는 오토바이를 탈 때만 헬멧을 쓴다. 물건을 건넬 때는 미소를 담뿍 지어 환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접었던 꿈을 다시 펼치기 우해 차곡차곡 열심히 길을 달린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