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언 땅을 들어 올리는 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도 입춘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누운 봄밤! 대화가 국수 토막처럼 뚝뚝 끊긴다. 고드름 부서지는 소리도 없다. 개는 일찍 잠들었나, 적막하다.

 

봄밤의 적막은 눅눅하다. 먹먹한 어둠을 올려다본다. 사각 천장이 거대한 도토리묵같다. 묵 표면에 작은 기포  같은 게 반짝인다. 도토리묵의 젖은 눈빛을 읽을 길 없다. 작게 속삭이는 도토리묵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전기장판 온도를 조금 높인다. 텔레비전을 다시 켤까 하다가 리모컨을 머리맡 고구마 자루에 올려놓는다.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난다. 점점 가까워 온다. 신작로에서 우리 집 앞으로 이어진 마찻길로 들어선다. 대동샘까지 왔다. 감나무 밑이다. 비닐하우스 곁이다. 부릉부릉 액셀을 당긴다. 빙빙 돈다. 말뚝에 묶인 발정 난 숫염소 꼴이다.

 

"누구래요?"

"남정네겄지."

"아는 사람이래요?"

"너도 아는 사람이여."

"왜 저런대요?"

"술 한잔하자고 저러지. 어미가 혼자 사니께……. 봄밤이잖아."

 

"좀 늦은 시간인데요. 불 켤까요?"

"내버려 둬. 저러다 그냥 가."

"맨날 와요?"

"술이 떡이 돼서는 혼자 저러다가 제 풀에 지쳐서 떠나. 담날 여기 왔다 간 줄도 몰라. 그냥 오는 거여."

 

"엄니를 좋아해서 오는 게 아니에요?"

"아녀. 진짜 좋아하는 과부는 따로 있어. 산양이란 동네에 나보다 어린 과부가 있어."

"근데 여기는 왜 와서 붕붕거린대요?"

"다 헛헛해서 그러지. 닭 대신 꿩! 꿩 대신 봉황!"

"바뀐 거 아니에요?"

"넌, 어미가 닭이었으면 좋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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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잠 놓친 거, 사랑 얘기 좀 해 줘요."

"먼젓번에 다 얘기했잖아. 진짜 사랑은 편애라고."

"벌써 시로 써 먹었어요. 그리고 그건 내리사랑이잖아요. 연애에 대해서 한 말씀 해줘요."

"내가 연애해 봤냐? 중매결혼인데."

"그래도 엄니는 모르는 게 없잖아요."

"어미는 결혼하고 난 뒤에 연애란 걸 해 봤다."

 

"엄니, 바람 피웠어요?"

"미친 놈, 내가 멋진 아버지 놔두고 눈이 삐었냐? 아버지 간수하기도 바빴는데."

"그럼 아버지랑 연애했어요?"

"그려, 결혼하고 나서야 사랑이 싹텄지. 중매결혼은 그래. 게다가 임신시켜 놓고 입대해 버렸으니, 둑수공방에 얼마나 그립던지. 휴가 나오기만 기다렸지. 내가 그때 알았다."

"뭘요?"

"사랑을 하면 가슴팍에 짐승이 돌아다니고 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는 걸 말이다. 귀가 젤 먼저 붉게 달아오리지. 귀에서 귀뚜라미 보일러가 팡팡 돌아가서 그런 거여. 그땐 생솔 가지 땔 땐데, 벌써 그 회사는 알았는가 봐. 쩔쩔 끓는 방에서 사랑 나누라고 보일러 이름을 그리 지었나?"

"어떤 짐승이 살아요?"

"모르긴 해도 황소 같아. 코끼리보다는 자발스럽고 원숭이보다는 점잖은 짐승, 말이나 소가 아닐까 싶어. 왜 소 키우는 데를 외양간이라고 하고 말 키우는 델 마구간이라 하지 않냐?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크는 데는 가슴간 아니겄냐? 내가 이름을 붙여 봤다."

 

"엄니 가슴간엔 누가 산데요?"

"난 죽어서도 니 아버지다. 그만한 멋쟁이가 없지. 술 많이 먹고 먼저 저 세상 간 거만 빼고는 흠잡을 데 없지. 술 취해서 농사일 안 하고 병치레 십 수 년 한 거 빼고는 알마나 멋졌냐?"

"그거 빼면 뭐가 남아요. 우리도 그런 얘기를 해요. 수업하고 업무만 없으면 선생 노릇 할 만하다고. 신문 기자들도 그런대요. 취재와 기사 쓸 일만 없으면 기자가 최고라고. 농사꾼이 농사는 안 짓고 병원비로 기둥뿌리 뽑는데, 뭐가 멋지대요?"

 

"그런 데에는 그럴 만한 속사정이 있는 거야. 사랑하면 그 눈물과 고통의 뿌리를 알게 되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식지 않고 끄느름하게 익어 가는 거여. 꽃 좋은 것만 보면 열매를 못 보는 거여. 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만 예뻐하질 않아."

"그럼 엄니 허리가 자꾸 굽는 이유가, 그 짐승이 커져서 그러는 고만요?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도 그 짐승이 밤낮으로 쪽쪽 빨아 먹어 그렇고요?"

"그려. 근데 넌 다 가르쳐 줘도 반밖에 몰라. 허리가 굽는 건 말이여, 가슴간 울타리가 자꾸 어름해지니까 그 짐승이 달아 나갈까 봐 그려. 그리고 가슴간이 자꾸 식으니까 짐승이 추울 거 아니냐. 그래 허리를 구부려 감싸 주려는 거지."

 

"그럼 쭈그렁 가슴은?"

"그건, 보는 나도 속상하지. 그쪽은 미용이 첫째인데, 하긴 그것도 늘어져야 짐승 우리를 잘 감쌀 거 아니냐? 이만하면 내 농담 짓거리가 막걸리 잔처럼 찰람찰람하지?"

 

오토바이마저 떠난 봄밤이다. 어머니의 가슴간 울타리에 어찌 아버지만 있으랴. 어머니 귀에 귀뚜라미가 우는가 보다. 귀를 베겟잇에 살포시 뉜다. 돌아누운 어머니의 등이 내 쪽으로 둥글다. 어머니 가슴속 짐승이 나를 보고파서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다. 고구마 자루에 올려 둔 리모컨이 방바닥으로 미끄러진다. 고구마에 싹이 돋나 보다. 고구마의 가슴에도 뿔 좋은 짐승 한 마리씩 뛰어다니는 봄밤이다.

 

글 : 이정록(시인)

글 출처 : 좋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