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분주한 황홀함보다 조금 쓸쓸함이 낫다.
꽉 차버린 풍요보다 좀 부족한 홀가분함이 낫다.
가을엔 눈부신 미모보다 혼자 가는 뒷모습이 아릿하다.
사랑도 가을엔 더 받으려고 애태우는 사랑보다
내어주고 고즈넉이 미소 짓는 사랑이 아름답다.


   ‘시간은 기다리는 이들에겐 나무 느리고, 슬퍼하는 이들에겐 너무나 길고, 기뻐하는 이들에겐 너무 짧다’고 한다.

   단풍의 아름다움에 간탄하고, 눈보라 몰아치는 들판에서 봄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매화가 피고, 매화 뒤를 따라 벚꽃이 피고, 그렇게 피나 싶던 벚꽃이 다 떨어진 자리에 찔레가 하얀 얼굴을 내미니 시간은 전속력으로 어딘가를 행해 질주하는 것 같다.

   슬퍼하는 이들에겐 길고, 기뻐하는 이들에겐 너무 짧다는 시간.

   그러나 천재라 불리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했다.

   마치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금강경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아인슈타인처럼 나는 과거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현재 또한 과거와 함께 가고 있구나, 여기며 살아간다.

   미래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 말처럼 단풍과 백설과 매화와 찔레를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글 쓰고, 생활하는 인왕산 자락엔 해마다 11월이 되면 피는 진달래가 있다. 봄에 한 번 피고, 단풍이 한창인 계절에 꼭 다시 피는 진달래는 두 번씩 찾아와도 언제나 반갑다. 그러나 가을에 핀 진달래를 본 사람들은 세상이 어지러우니 꽃까지 어지러운 모양이야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계절의 순환에 깊이 길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아인슈안인의 발언은 마치 가을에 핀 진달래처럼 혼란스러울 수도 잇다. 마음의 문니 굳게 닫힌 사람에겐 조그만 변화도 커다란 부담이다 저항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굳게 믿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좀체 의심하지 않는다. 시간도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강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 단풍이 지고 나야 겨울이 온다고 생각한다. 단풍 다음에 겨울이 오니 꽃 피는 봄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풍은 새순이 돋고, 그 새순이 커다란 잎사귀로 자라난 뒤 대지로 떨어질 무렵에야 물드는 것이니 가을의 입장에 서지 않고 봄 입장에 서보면 단풍은 겨울과 봄 다음에 오는 계절이다.

   우리는 다만 끊임없는 순환 속에 있을 뿐 계절 또한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신이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어떤 대상도 가을의 입장인 당신이 봄의 입장에 서보면 비난이나 비판보다 칭찬이나 동의를 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기다리는 이들에겐 너무 느리고, 걱정하는 이들에겐 너무 빠르다고 썼던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없다’라는 문장을 덧붙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당연히 시간이 없다. 서로에게 몰입한 그들이 그것 외에 다른 무엇을 돌볼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열정에 빠진 그들이 또 시간 가는 줄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사랑도 시간을 잊어버리고 몰입하는 사랑보다 넉넉히 기다리며 여백을 남겨놓은 사랑이 오래간다.

   몰입은 순간일 뿐 오래갈 수 없다. 오랫동안 몰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몰입이 아니라 아마 마약일 것이다. 마약은 그러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 계속 투약해야 한다.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공황 상태에 빠지니 몰입했던 사랑이 빠져나갈 때 마음도 따라서 무너지는 건 그 때문이다.

   꽉 차버린 풍요보다 좀 부족한 홀가분함이나, 더 받으려고 애태우는 사람보다 내어주고 고즈넉이 미소 짓는 사랑이 더 아름다운 건 그것이 여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백은 휴식과 같아서 그런 여백을 가진 사람과 하는 사랑은 몰입보다 오래간다. 이별을 한다 해도 여운을 남기고 헤어지는 이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슬퍼하는 이들에겐 길고, 기뻐하는 이들에겐 너무 짧다는 시간.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과거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시간에 쫓길 이유가 없다. 한 방향으로 흘러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는 과거와 미래에 묶이거나 근심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떠나는 계절이 아쉬워도 붙잡지 말자. 붙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지만,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 그것 또한 어딘가에 동시에 존재할 것이니…….

글출처 : 나의 치유는 너다(김재진, 쌤앤파커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