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허형만(1945∼ )

 

세상의 풍경은 모두 황홀하다
햇살이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이며
유채꽃 속에 온몸을 들이미는 벌들까지
황홀하다 더불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내가 다가가는 사람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모두
미치게 황홀하다 때로는 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오, 황홀한 세상이여 황홀한 세상의 풍경이여 심장 뜨거운 은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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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풍경은 모두 황홀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축복받은 가난한 마음은 생래적인 것일까, 화자가 생명의 큰 고비를 넘긴 적이 있어서 획득한 것일까.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이 세상을 눈으로 보는 것이 기껍기만 한 사람의 마음은 그 어떤 풍경이라도 황홀히 흘러들어 적실 것이다. 하물며 ‘햇살이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이며/유채꽃 속에 온몸을 들이미는 벌들’이라니! 몸속에 폭죽이 터진 듯 황홀감으로 멍하리라.

 

나! 나! 나! 우리! 우리! 우리! 나의 활짝 열린 감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한 풍경으로 달콤한 수액처럼 차오르는 행복감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로 옮아가고 증폭돼 ‘미치게 황홀하다’! 봄의 은총, 꽃의 은총, 생명의 은총을 황홀하게 구가하는 시다.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들은 모진 겨울을 살아낸 생명체들에게 보내는 봄의 갈채. 그래서 봄에 박탈당한 생명은 더 아깝고 가슴 아프다. 내게 마음을 준, 내가 그 마음을 외면했던 고양이가 있었다. 베티, 내가 저버린 고양이. 겨울이 지독히 추웠던 몇 해 전, 그 겨울을 간신히 났건만 봄이 되자마자 누군가가 독을 먹였다. 볕 좋은 날마다 거기 베티가 없어 고통스러웠던 봄….

 

하물며 4월, 세월호 그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 유채꽃밭…, 흰나비 떼 날지 않아도 그이들 생각나리라.

 

글 출처 : 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