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아이콘의 중심에 선 사나이 박승대
“제가 ‘웃찾사’ 식구들 대장이라고 하면 다들 의아해해요. 개그맨 시절엔 너무 안 웃겼나 봐요~”

요즘 ‘개그콘서트’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 ‘폭소클럽’에 나오는 개그 유행어 중 하나 이상은 따라 해야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매회 시청률 최고를 기록하면서 ‘웃찾사’ 보는 시간대엔 전화 통화도 금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부분 신인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들 중심에 ‘올드’ 개그맨 박승대가 있다.

‘멀대’ 박승대 사고 치다
지난 1월 17일에는 연예계 데뷔 이후 두번째로 일본을 방문했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개그기획사 대표로 떠나는 여행 길이다. 10여 년 전 일본을 처음 방문하던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코미디 프로그램 시스템이 발달한 일본 ‘요시모토’사에 초대받아서 간 것이었다. 개그맨 생활 20여 년을 통틀어 개그맨으로서 최고 주가를 날리던 KBS-TV ‘쇼 0비디오자키’ 프로그램 중 ‘동물의 왕국’ 코너 시절의 일이다. 박승대(38)는 키만 ‘멀대’같이 컸을 뿐 개인기가 뛰어나거나 우스꽝스런 표정연기가 일품인 개그맨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 실수가 터질지 모를 어색한 연기 탓에 그의 인기는 항상 ‘밑바닥’이었다. 열정과 애정만으로 살아남기 힘든 개그맨 생활. 마음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그럴수록 자신감은 상실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무시와 멸시는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럴수록 연기에 대한 집착은 커져만 갔다.

“기가 죽었다는 표현이 그때 상황을 가장 정확하고 절실하게 나타낸 말일 거예요.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 PD들이 개그맨을 그만두고 다른 진로를 찾아보라는 충고를 할 정도였습니다. 버틸수록 집착을 버리라는 비아냥거림만 들려왔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하지만 오기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었죠. 그때도 선후배들의 연기를 보면 ‘대박감’은 눈에 보였는데, 정작 그 연기를 직접 하려면 어색하고 보이지 않더란 말이죠. 답답하고 암울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개그도 인간관계도 잘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데뷔 후 14년 동안 일해온 방송국을 떠나야 했다. 다시 인기를 손에 넣기엔 너무도 늦은 나이. 게다가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나오지 않았다. 인기와 아이디어는 동반 추락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새삼 느껴지듯 대기실엔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후배들만 가득했다. 술에 절어 보내는 시간 동안 자살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다. 그럴 때마다 일본을 방문한 그날을 떠올렸다. 요시모토의 시스템이 언젠간 국내에도 들어올거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외주 제작하는 시스템은 개그맨들의 주가를 올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인들의 엉뚱하고 황당한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수 있는 여유도 가지고 있었다. 또 방송국 시스템에 휘둘리지 않고 수준 높은 개그를 창조해냈다. 그날의 충격을 되새길 때마다 선배들은 손사래를 쳤다. 그건 일본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왜?’라는 질문의 연속. 그는 대학로로 발길을 돌렸다. 1999년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인기 없어 ‘버려진’ 개그맨들을 모았다. 공연을 맘껏 할 수 있는 대학로로 가면서 그는 다짐했다.
“언젠가 방송국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죠. 방송국을 나올 때 용기를 주던 선배보다는 퇴출당하는 맛을 안겨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개그와 떨어진 삶은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집중해도 모자란 실력이었으니까요.”

당시 박준형, 이승환, 김현기가 합류했고, 이들은 대학로 소극장을 빌려 ‘스마일 매니아’란 팀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포스터 돌리는 일은 기본. 월요일만 빼고 매일 공연을 했다. 서너 명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건 다반사. 그래도 행복했다.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큰 위안이 됐다. 관객을 모으기 위해 길거리 ‘삐끼’도 했다. 길에 서서 관객을 모을 때면 10분이 걸려 설명하느라 정신없었다. 즉석에서 공짜 티켓을 건네며 자리를 빛내달라는 부탁도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처음엔 떠오르지 않던 개그도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개그는 ‘끼’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열정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란 걸 새삼 느꼈다.

그러던 2001년 정종철이 동참하면서 박준형, 이승환과 함께 ‘갈갈이 삼형제’를 만들었다. 이들의 개그가 무대에 오르자 관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져 매진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때’를 만난 것이다.

“비장한 각오로 2년 만에 방송국을 찾았습니다. 기분이 묘하더군요. 관계자들을 일일이 찾아 ‘대학로 개그’를 설명했죠. 처음엔 제 말을 믿지 않더군요. 당연한 일이었죠. 기획사에서 예비 스타를 발굴해 집중적인 훈련을 시킨 후 공중파 무대에 올리는 ‘스타 제조법’이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었거든요. 개그계의 첫 시도였죠. 인기 한 번 얻지 못한 개그맨이 찾아와 대박 날 개그 아이템을 찾았다는 말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무리였죠. 그래서 공연일에 맞춰 시간을 내달라는 부탁을 연거푸 드렸죠.”

2년여에 걸친 치열한 검증이 결실을 맺는 날이었다. ‘갈갈이 삼형제’는 ‘개그콘서트’로 화려한 부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후 2년여의 인기도 잠시, 역경을 같이 이겨낸 ‘갈갈이 삼형제’는 그와 잦은 다툼이 벌어지면서 각자 갈 길을 찾아 헤어졌다. 두번째 시련이 그 앞에 서 있었다. 2003년 11월의 일이다. 평생을 함께할 듯 서로 의지하던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당시엔 원망도 했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오뚝이 아시죠! 방송국에 있을 때 제 별명이 오뚝이였어요. 멀대와 오뚝이. 아무리 심한 무시를 당해도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타나 똑같이 어색한 연기를 한다며 지어준 ‘비참한’ 별명이죠. 하지만 그 근성은 시련을 이겨내는 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인기 개그맨을 떠나보낸 기획사가 1년 만에 재기한 전례가 없다는 위로(?)가 쏟아졌다. 또다시 오기가 발동했다. 개그맨 생활을 접고 대학로에 왔던 날보다 더 비장했다. 새로운 인물을 발굴해 보란 듯이 성공해야겠다는 다짐뿐이었다. 이번엔 완벽한 신인 발굴을 시도했다. 개그맨이 되고 싶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홍보부터 시작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매주 금요일 3시면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개그맨 지망생들을 위한 오디션을 열었다. 교복 입고 오는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직장인까지 수십 명의 지원자들이 그를 찾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칭찬을 하거나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 순간 그들의 능력은 정체된 듯 머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심한 욕설이 오가고 무시와 멸시가 연습 무대에 가득했다.

“너 꺼져!”라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또다시 그를 찾아오는 후배들의 열정에 그도 감동받았다. 게다가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화려한 ‘컴백’을 예감했다. 수십 명의 지망생 중 31명의 ‘외인부대’가 만들어졌다. 무료 공연을 준비하며 개그맨들의 열정과 끼를 모았다. 처음 대학로 무대에 설 땐 1분 분량의 대본도 짜기 힘들던 배우들이 점차 시간을 늘려가면서 5분 분량의 완벽한 대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5분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위해 거의 다섯 달 동안을 꼬박 고생해야 했다. 시행착오의 연속. 그렇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아이디어 회의를 거친 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공연 무대에 올린 뒤 ‘잔인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연기에 대해 반성하고 전진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이 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오뚝이’ 박승대 성공하다
곧바로 ‘웃찾사’ 프로그램을 찾았다. ‘개그콘서트’에서 성공한 것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대학로로 가던 처절한 날을 기억하며 다시 도전했다. 예전처럼 방송국에서 그날그날 아이디어를 기획해서 무대에 서면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 힘들다는 설득이 통했다. 2~3년 준비한 개그만이 폭발력 있는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웃찻사’에서 첫 방송이 나간 후 반응이 좋지 않은 코너는 바로 막을 내렸다. 담당 PD가 한두 회 더 지켜보자고 제안해도 오히려 그가 거절했다. 대박 난 드라마나 영화는 두세 번 연거푸 보지만 개그는 다르다. 한 번 반응을 얻지 못하면 ‘억지웃음’을 자아내려 애쓰게 되고, 재미있는 코너를 반복하는 것은 싫증을 불러일으킨다는 그만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가 대학로에서 수십 명의 후배들을 키우는 것도 ‘틈새’를 없애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넘치는 후배들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걸 어떤 형태로 잡아내느냐는 그의 몫인 것이다. ‘웃찾사’의 ‘택아’는 방송 관계자의 웃음을 자아내진 못했다. 하지만 대학로의 경험을 살려 살짝 투입한 ‘코너’다. 그는 자신을 ‘개그계의 히딩크’라 칭한다. 정작 자신은 잘나가는 개그맨은 아니었지만 정확한 ‘감’을 파악할 줄 아는 조련사라는 뜻이다.

“지금도 ‘웃찾사’ 출연진의 70%가 제 식구입니다. 전문가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진 못해도 막상 무대에 올리고 나면 확실히 반응이 오는 아이템들이 있어요. 그걸 대학로 무대에서 검증을 거친다는 작업이 질적인 수준을 올리는 데 한몫한다고 생각해요. 그 옛날 일본에 방문했을 때 감동받았던 요시모토사의 시스템을 제가 국내에도 접목시키고 있는 거죠. 당시엔 모두 불가능할 거라고 했지만 전 해냈습니다.”

이미 케이블 TV ‘M.net’의 ‘뻔뻔 개그쇼’에서도 매주 50여 명이 항상 출연하고 있다. 프로그램 전체를 그의 신인 개그맨들이 꾸민 코너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그 프로그램의 외주 제작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꿈은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상설 극장을 만드는 것이다. 수십억원의 자금이 투입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거대한 작업을 꿈꾼다. 쉽지 않을 거란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불가능해 보이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불가능’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오기’가 샘솟는다고 했다. 개그맨이라면 누구나 품는 꿈이지만 그는 이뤄낼 자신이 있다. 꿈과 목표는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후배들에게 늘상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한다.

“왜 개그를 하려 하는지, 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스타가 되려 하는지, 개인기는 있는지… 어제는 40대 정도 되는 일본인이 저를 찾아왔더라구요. 개그를 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도 물었습니다. 서툰 한국말로 개그를 하고 싶다는 그 사람을 보면서 흐뭇했습니다. 일본인이 저를 찾아와서 개그맨을 시켜달라는 주문을 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그만큼 제가 유명한 조련사가 된 거죠.(웃음)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았어요. 나이는 세상이 주는 수치에 불과하다는 걸… 도전하는 자에게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요.”

그는 노총각이다. 일에 빠져 지내며 결혼은 생각도 못했다. 결혼을 해야겠다는 절실함도 부족한 상태다.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산 건 아니지만 시기를 놓친 셈이다. 밤늦게 일을 마치고 후배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위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개인적인 시간은 거의 낼 수가 없다. 결국 여자친구를 사귀어도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결혼도 운명이라 생각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로 무대에 서는 후배들의 공연을 일일이 관람하며 모니터를 해주는 스마일 매니아 박승대 대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모습엔 자신처럼 실패하는 개그맨이 사라지는 그날을 기대하는 열정이 살아 있다. 수많은 후배들은 그의 손을 거쳐 무대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개그계의 대부’ 박승대. 그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이다. 그날을 위해 그는 쉼 없는 열정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강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