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영 배 ( 戒 盈 杯 )
 
 
계영배(경계할戒, 찰盈, 잔杯)의 한자성어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 즉,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계영배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면
이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넘치면 곧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교훈이다.
 
이는 곧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 이라는 속뜻이 있다.
 
과욕을 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물 이기도 하다.
계영배는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서 하늘에 정성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어졌던
"의기(儀器)"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자료에 의하면 공자(孔子; BC 551 - BC 479)가
주(周)나라 환공(桓公; ? - BC 643. 나라의 군주)의 사당을 찾았던 적이 있는데
생전의 환공께서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던 잔인 의기를 보았다 한다.
 
이 의기에는 밑에 구멍이 분명히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를 않지만,
7할 이상 채우게 되면 밑구멍으로 쏟아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한다.
이는 마치 현대의 "탄타로스의 접시"라는 화학 실험기구와 비슷한 원리인 것이었다.
 
환공은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로 불렸다 한다.
이를 본 받은 공자도 유좌지기를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었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 한다.
공자 의 공자됨이 바로 이 의기인 계영배(戒盈杯)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계영배를 만든 분으로 전해지는 사람은
무등산의 실학자로 불리 우는 하백원(1781 - 1844) 과 우명옥 이다.
하백원은 전남 화순지방에서 태어나 20세까지 학문을 배우고 23세부터 53세까지
30여년간 실학연구에 몸을 바친 과학자, 성리학자, 실학자였다.
 
그가 만든 대표작은 양수기 역할을 하는 자승차, 계영배,
펌프같이 물의 수압을 이용한 강흡기,
시간이 되면 스스로 소리를 내던 자명종, 청기와, 유리, 벽돌 등의 제조 및
대동여지도 보다 51년 앞선 동국지도, 세계지도, 천문도 등이 있으나
현재 하백원의 계영배는 전해 지는 것은 없는 듯 하다.
 
우명옥은 강원도 홍천지방의 전설에 의하면 우삼돌(우명옥)이라는 도공이 있었는데
사기그릇을 만드는 것을 동경하여 오다
마침내 조선시대 왕실의 진상품을 만들던 경기도 광주분원으로 갔다 한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고 익혀
마침내 스승도 이루지 못한 "雪白磁器"를 만들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반상기는 왕실에 진상이 되었고
왕은 "雪白磁器"의 아름다움에 경탄하여 상금과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 후 명옥의 동료들은 그가 잘되는 것을 질투하여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게 꾀인다.
방탕한 생활은 계속 이어졌고 얼마가지 않아
그 동안 사기그릇을 만들어 모은 재물을 전부 탕진한다.
그 재서야 그 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승에게 돌아온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물에 목욕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자 그는 스승에게 조그만 한 잔을 보여주며
이 잔을 계영배 라고 하였다.
잔에 술을 가득 부었으나 술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다시 술을 반쯤 붙자 술이 남아 있었다 한다.
 
스승은 그제서야 무릎을 치며 명옥이 술로 망했으니 술을 조심해서 마시자라는 뜻으로
과하게 마시지 말자라는 교훈이 담긴 것으로 깨 달았다 한다.
그 후 술잔은 의주의 임 씨라는 사람이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시대 의주 거상 임상옥(1779 - 1855)이 였다.
 
임상옥은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리면서
큰 돈을 만들었다고 한다.
임상옥이 청부로서 조선 최고의 큰 재물을 만든 바탕은
계영배의 기운을 끊임없이 느끼고 그 교훈을 되새긴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임상옥이 우연히 계영배를 깨뜨렸는데
이상한 일은 그 잔이 깨어지던 날 우명옥도 세상을 떠났다 한다.
 
 

 
 
# 임상옥
 
조선 말엽 정조대왕 때인 을묘년 3월 열이렛날,
평안도 의주 땅에 사는 거상 임상옥(林尙沃)의 저택에서는
고관대작이 모여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임상옥의 회갑연이었다.
 
귀빈들만 해도 평안감사, 병사, 군수들이 초대되었고 서울을 비롯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같은 먼 곳에서도 귀빈들이 모여들었다.
 
정조 3년(1779) 12월 10일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한 임상옥,
그는 18세때부터 상업에 나서서 온갖 고생을 거듭한 끝에 국제무역상으로 대성한다.
 
그가 어느 정도의 거부였는가를 아는데 좋은 자료가 있다.
그의 문집인 가포집에 의하면 그가 38세 되던 해에
백마산성 서쪽 삼봉산 밑에 선영을 옮겨 모시고
그 이듬해에 선영 밑에다 수백간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의주부윤 등 일행 7백명이 찾아갔을 때 한꺼번에 음식과 요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관원을 대접하는 주부식이며
그 주부식과 요리를 담을 그릇들의 어마어마함을 족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 임상옥의 회갑잔치이니 그 호화찬란함이야 말해 무엇하랴.
 
역시 청나라를 상대로 국제무역을 하던 부친을 일찍 여위고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임상옥의 효성은 지극했다. 
임상옥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어린애 돌 때 입는 색동옷을 입고
복건을 쓰고는 어머니 앞에 잔을 올렸다.
그 옆에는 아리따운 기생들이 헌수하는 노래가 곁들여졌다.
 
"어머님, 소년 과수의 외로운 몸으로 이 불초 자식을 기르시느라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모쪼록 여년을 즐겁게 만수무강하십시오."
 
임상옥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술잔을 받는 자당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사랑으로 나간 임상옥은 집사를 불러 한양에서 가져온 물건을 대령하라고 명했다. 
곧 집사가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임상옥 앞에 대령했다.
임상옥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아주 작은 술잔이었다.
 
임상옥은 술잔을 평안감사에게 올렸다.
 
"명기(名器)라 하여 한양에서 가져온 술잔입니다. 한잔 드시지요!"
 
기생들의 권주가가 울려나오고 임상옥은 그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안감사가 놀랍다는 듯이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시오. 임곽산 영감. 영감이 따룬 술이 다 없어졌소."
 
54세 때 곽산현감(郭山縣監)을 역임했고 55세 때에는 구성부사(龜城府使)를 역임했기 때문에
빈객들은 임상옥을 영감이라고 불렀다.
 
"아니, 술이 다 없어지다니요?"
 
과연 술잔에는 술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변이었다.
하지만 임상옥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술을 잘못 따룬 것 같습니다."
 
임상옥이 재차 술을 따랐다.
 
"어허, 술이 또 없어졌구려"
 
그랬다. 분명히 술잔에 가득 따루었는데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대여섯번을 되풀이 했는데 번번이 술을 없어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술잔을 내오게 해서 술을 따루니 이번에는 잔에 술이 철철 넘쳤다.
 
그렇게 해서 이날의 잔치는 무사히 넘겼다.
 
며칠 후, 임상옥은 문득 생각이 나서 한양에서 가져왔던
그 희안한 술잔을 가져오게 해서 실험을 해 보았다.
 
물을 한잔 가득 부었다.
역시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고 술잔, 못 쓰겠다. 무슨 요기가 뻣쳤지 이럴 수가 있나.
이런 것이 집안에 있으면 어떤 괴변이 생길지 모르니 없애버려야 해!"
 
임상옥은 옆에 있던 목침을 집어들고는 술잔을 힘껏 내리쳤다. 쨍그렁! 두 조각이 났다.
그런데 깨어진 술잔에 촛불이 어리더니 무슨 글자 같은 것이 보였다.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與爾同死)"
(가득 차게 따라 먹지 말게 하고, 너와 같이 죽기를 원한다)
 
임상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술을 가득 따르지 말라. 그렇다면 내가 잘못 했구나.
조금씩 따라 마실 걸. 이제 잔이 깨어졌으니 방법이 없네.
 
다음 순간 임상옥은 깨어진 다른 쪽 조각을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다음과 같은 글자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 을묘 4월 8일 분원(汾院) 우명옥(禹明玉).
 
― 그러고보니 오늘이 바루 4월 8일, 이 잔을 만든 자는 내가 이 술잔을 깨뜨릴 것을 알고 있었어.
 
희한한 일이었다.
 
임상옥은 그 이튿날 일찍 하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우명옥이란 사람을 만나면 술잔에 새겨진 글의 내막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였다.
 
여러 날 만에 임상옥 일행은 광주 분원에 당도했다.
우명옥의 집은 분원 근처 산밑에 있는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이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나이 70여세 되어 보이는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마주 내려오며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양 반가이 맞았다.
 
"아유 의주 임곽산 영감께서 오셨습니다그려.
어서 오십시오."
 
노인의 집으로 간 임상옥은 수인사를 마쳤다.
 
"나는 보신대로 임상옥이외다마는 영감께서 우선생이시오?"
 
"아니요. 나는 성이 지가올시다. 명옥이는 내 제자지요.
십여일 전 바로 4월 8일날 저녁 술시쯤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지요.
그때 명옥이가 유언을 남겼는데 임영감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과
초종 범절을 이러 주실 것이라 하여
시체를 감장도 않고 영감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임상옥은 지노인의 말을 듣고 즉시 우명옥의 시체를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낸 뒤
지노인의 집에서 2∼3일 묵으면서 우명옥이 술잔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술잔이라면… 아 그거 계영배(戒盈杯)올시다.
하지만 임영감께서 깨버리셨다니 계영배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한이 올시다."
 
이로부터 지노인은 계영배에 얽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우명옥
 
우삼돌(禹三乭). 우명옥의 본명이다. 그는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 질그릇을 구워내며 살았다.
 
어느덧 나이 스물 셋. 하루는 사기로 유명한 분원으로 가서 깨끗한 사기를 만들 생각으로
집을 떠나 광주분원 외장으로 있는 지영감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삼돌이는 여러 동료들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흙 반죽에 그릇 모형 만드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는 사이 기술도 일취 월장하여 보는 사람마다 눈들을 크게 뜨고 혀를 내둘렀다.
 
이해 봄, 삼돌은 나라에 진상 바칠 반상을 전담해 만들게 되었다.
스승 지외장은 옷 한 벌을 새로 해 입히고 관례를 시키면서 이름으로 명옥(明玉)이라고 고쳐 주었다.
 
그러나 우명옥에 대한 동료들의 시기 질투는 나날이 거듭되었다.
 
지성이면 감천,
우명옥이 만든 반상은 임금께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아 명옥이에게 특별상금까지 내렸다.
지외장도 기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명옥의 솜씨를 치하하는 동료들도
뒷전에서는 어떻게 하면 명옥을 몹쓸 놈으로 만드느냐, 궁리에 바빴다.
 
마침내 동료들의 음모가 무르익었다.
어느날 동료들은 명옥에게 뱃놀이를 가자고 유혹했다. 
몇 번 사양 끝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명옥은 아름다운 기생들의 수발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번 맛들인 기생의 풍류. 그로부터 우명옥은 색주가 집에 파묻혀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날이 갈수록 수정에 있던 돈은 톡톡 털렸고 이제는 술과 계집에게 바칠 돈이 필요하자
상사발 상대접같은 보통 물건을 마구 구워내어 돈을 만들어 색주가에 바쳤다.
 
더 큰 돈이 필요해진 우명옥은 나쁜 동료들과 함께 전라도 지방으로 행상을 나갔다.
과욕이었다. 태풍을 만나고 해적을 만났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
 
간신히 분원으로 돌아오니 50호 가량 되던 분원 마을도 폭풍우로 쓸려나가고 폐허가 되어 버렸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복구하느라고 애를 썼다.
우명옥도 마을 사람과 동료들을 격려하며 마을 재건에 두팔을 걷어부쳤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우명옥 자신은 산위로 슬슬 돌아다니거나
나무밑으로 왔다갔다 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굴었다.
스승 지외장은 그런 우명옥을 바라보며 걱정했다.
 
하루는 밤중에 우물에서 물 푸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보니
우명옥이 벌거벗고 두레박에 물을 길어올려서는 머리끝에서부터 들이붓는 것이었다.
 
지외장은 기가 막혔다. 정말 우명옥이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또 몇 달이 흘렀다.
하루는 우명옥이 또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온몸에 퍼부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세상 사람들을 망치는 술을 조금씩만 먹게 하는 술잔을 하나 만들게 해 줍소서.
그러면 이놈은 그 술잔과 같이 목숨을 바치겠소이다.
이놈의 한 가지 소원을 이루게 해 주소서!"
 
지외장은 비로소 우명옥의 비장한 결심을 목격하고 안심했다.
 
그런지 얼마 뒤, 우명옥은 지외장 앞에 조그만 술잔 하나를 내밀었다.
 
"선생님,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에 이런 술잔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앙증맞은 술잔이었다. 명옥은 그 술잔에 가득 물을 부었다.
 
"선생님, 물을 가득 부으니 물이 없어졌습니다."
 
"정말 그렇구나!"
 
지외장도 놀랐다.
 
"하지만 술잔에 술을 부었는데 술이 없어지면 어찌 하나?"
 
"한번 보십시오."
 
명옥은 술잔에 7,8부쯤 물을 부었다.
 
"이제는 물이 안 없어집니다. 이 술잔을 제가 계영배(戒盈杯)라고 이름을 부쳤습니다."
 
지외장은 계영배를 만든 우명옥의 재주에 거듭 감탄했다.
 
그리고 그 계영배는 우명옥의 손에 의해 중앙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진상되었고
그 계영배는 임상옥의 육순잔치 기념품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참 아까운 사람을 잃어 버렸소이다.
선생 되시는 지외장의 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소이다만
계영배의 참뜻을 진즉 알았더라면 내가 계영배를 깨뜨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우리나라의 명인 한 사람을 내가 죽였소이다.
 
자, 이것으로 약소하나마 우선생의 대소상이나 섭섭지 않게 지내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근처의 지내기 어려운 양반들에게 조금 성의를 베풀고 가겠소이다."
 
당대의 거상 임상옥은 철종 6년(1855) 5월 29일
77세의 고령으로 의주 본제(本第)에서 장서(長逝)하였다.
 
임상옥의 문집인 가포집에 다음과 같은 만시(輓詩)가 있다.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