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어느 날. 명동의 음악 카페 '쎄시봉'에 색다른 젊은이 3명이 통기타를 메고 나타났다.
송창식, 윤형주, 이익근이 CBS 라디오 명랑백일장(MC 이상벽)에 첫 출연 후 방송활동을 시작하면서 포크라는 장르를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트리오 쎄시봉' 활동은 이익근의 군복무로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1968년 2월 송창식 윤형주 두 젊은이가 트윈폴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기타 두 개뿐인, 지극히 단촐한 연주를 펼치는 그들은 경쾌한 비트, 발랄한 음색으로 그때까지 한국가요를 지배했던 영탄적 분위기를 걷어내고 젊은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듀오 '트윈폴리오'는 그 여세를 몰아서 1년 뒤 69년 첫 독집음반을 냈고 번안곡 '하얀 손수건'을 히트시켰다.
그러나 69년 12월 22, 23일 드라마센터에서 고별공연을 끝으로 짧은 20개월의 트윈폴리오를 해체하고 송창식, 윤형주 각각의 솔로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몇 년은 포크의 황금기이자 춘추전국시대였다.
젊은 가수들은 한결같이 통기타를 다뤘다. 여가수로는 양희은-박인희-이연실이 삼두마차를 이루었고 라나에로스포, 쉐그린, 은희, 김정호, 어니언스, 4월과 5월이 인기를 얻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시대도 이때 열렸다.

그 중 재치와 유머, 그리고 깔끔한 모던 포크를 선보인 김세환은 경희대 재학중 윤형주의 권유로 방송생활을 시작하였고, 양희은은 1968년 당시 미문화원의 학생 영어클럽 오크의 창립기념 행사에 초청된 트윈폴리오에게 기타반주를 무턱대고 부탁한 후 그녀의 가창력을 선보인 것이 인연이 되어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72년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정치상황은 포크의 자유로운 정신을 압박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낙인찍힌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시의에 맞지 않음' '창법저속''불신감 조장' 같은 모호한 이유로 금지곡을 양산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영화에서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낙담한 주인공이 자살하는 장면에 쓰였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하는 등 무려 440곡 이상이나 금지되었다.

그 이후 대중적인 포크는 가사와 멜로디가 서정적인 경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출처 : Big 4 Folk Concert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