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방후 최초의 팝송 가수 김해송

1945년 8월 7일 미국의 B29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지 1주일만인 8월 15일 일본 천왕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방송과 함께 이 땅에는 해방이 찾아 왔다.

8월 18일 이범석 장군이 중국 서안에서 미군 특별기편으로 귀국하고 9월 8일 미군이 입성하기 이전인 8월 말쯤, 미군 장교들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사전협의를 위해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해 조선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에서는 이들의 환영파티를 위해 한국인 연주단을 초청케 되었다.

이 때는 정식 악단이 따로 있었던게 아니었기 때문에 수소문 끝에 실내악단이 급조되었는데, 당시의 멤버로 전희봉, 이동춘, 김준덕, 김희조, 김호길, 전봉열 등이 미국의 민요와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카르멘 실버 왈츠, 창공 등을 연주했다.

이들은 격식을 갖춘답시고 모닝 코트에다 일본 신발인 찌까다비를 신고 연주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고 원로가요인 황문평 선생은 그의 저서 『가요60년사』에서 술회하고 있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이었기에 우리 사회는 질서가 안잡힌 어수선한 가운데 생활도 어려워 음악인들은 자연스럽게 미군부대 주변을 맴돌면서 그날그날 급조된 악단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을 드나들며 연주하는 철새 신세였지만 그래도 미군들이 주는 C레이션이나 초콜렛 등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기에 기지촌 주변은 항상 북적거렸다.

이때 널리 불려졌던 곡들로 'My blue heaven', 'Sentimental journey', 'You're my sunshine' 등이 있는데 이때는 영어를 구사할줄 아는 가수가 거의 드물어 가수들이 영어 발음을 한글로 토를 달아 가사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앵무새처럼 외워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된 가운데 김해송이 'My blue heaven'을 유독 잘 불렀고 레코드까지 취입했다.


2. 6.25 계기로 팝음악 본격 도입

1950년 6.25가 터지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지금은 그 숫자가 3만 7천명에 불과하지만 한창 때는 20만명이 넘을 정도였다.

6.25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아픈 전쟁으로서 막대한 국토와 재산, 인명피해를 주었지만 가요사적인 측면에서 볼때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미8군 쇼'라는 주한 미군을 위문하는 연예창구가 마련되면서 이는 후일 우리 가요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연예인들을 배출한 터전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성립되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얼마 후 의정부, 동두천, 문산, 파주, 송탄, 부산, 대구, 군산, 서울, 용산 등지에 미군부대 기지촌이 생기고 근처에 미군 클럽이 들어서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미8군 쇼' 단체가 등록됐다.

처음에는 악단 위주로 미군 계통에서 흘러나오는 당시 유행 음악을 연주하다가 곧이어 플로어 쇼(패키지 쇼)라는 명칭으로 노래와 춤이 섞인 무대가 유행했다.

이들 공연 단체는 미군이 주둔한 캠프촌을 순회하는 쇼 단체로서 처음에는 일정한 보수가 있었던게 아니라 하루저녁 공연에 위스키 몇 병, 또는 캔 맥주 몇 박스로 때우는 그야말로 하루살이 흥행이었지만 전후 시중의 연예바닥은 거의 전멸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이런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들은 공연을 위해서 미군 트럭을 타고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녀야만 했기 때문에 굶고 다니기가 다반사였다.

이들을 본 클럽의 책임자가 측은하게 생각해 쇼 단원들에게 간식용 햄버거와 콜라를 하나씩 나눠주곤 했는데 처음 마셔보는 콜라의 짜릿한 맛과 구미를 당기는 햄버거는 그들에게 있어서 별미였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집에 두고온 처자식이 생각나 햄버거를 손수건에 싸 호주머니에 넣고 콜라는 이따가 마시겠다며 따지 말라고 했지만 남의 속도 모르는 미군클럽 책임자는 "이따가 또 줄테니 마셔"라며 기어이 병마개를 따던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미8군 쇼'는 가장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수단이 된 가운데 1955년 9월, 전쟁의 상처가 아물며 국민의 생활도 제법 윤기가 흐를 즈음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 >이 등장하고 장안의 멋쟁이를 자처하는 부류들이 비록 읽지는 못하지만 영어잡지 『타임』지나 『라이프』지를 들고 다니는 소위 서양바람(?)이 불면서 서울 시내에 팝 뮤직을 틀어주는 음악 다방이 등장했는데 종로의 '돌체', '영보', 명동의 '은하수'등 음악다방에는 장안의 멋쟁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즈음 유명했던 파퓰러 뮤직(당시는 이렇게 불렀다)으로는 단연 패티 패이지가 최고 인기로 그녀의 'I went to your wedding', 'Changing partner', 'Let me go,lover' 등이 유명했으며 남자 가수로는 페리 코모의 'The rose tatto', 'Mi casa su casa(my house is your house)', 냇킹 콜의 'Too young', 'Answer me my love' 등이 인기있는 곡으로 미국의 팝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6.25참전 16개 국가의 노래가 간헐적으로 유행했는데 영국의 e>, 불란서의 , 터키의 <우스크다라>, 이스라엘의 <하바나 길라 > 등이다.

3. 마릴린 몬로의 내한 공연

6.25가 일어나고 이듬해인 1951년 12월, 전쟁중인 가운데 세계적인 육체파 배우이자 영화 '돌아올 수 없는 강'의 주제가 'The river of no return'의 주인공 마릴린 몬로가 내한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대구에 있는 K2 동촌 비행장 근처 야산에는 미군 장병들을 가득 태운 차량이 대부대가 이동하듯 몰려 들었다.

대구 시민들은 미군이 후퇴하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다름아닌 마릴린 몬로와 코미디언 밥 호프 일행이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불도저가 능선을 밀어 붙여 만든 야외 가설 무대에는 야전점퍼와 군복을 차려 입은 몬로가 올라와 노래하는 모습에 장병들은 기성을 발했다.

장병들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열광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운좋게 무대위로 불려온 한 장병은 몬로에게서 뜻밖의 키스 세례를 받고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영원히 세수를 않겠다며 흥분했던 에피소드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이처럼 밥 호프가 이끄는 크리스마스 위문단은 매년 전세계 주둔하고 있는 미군 장병을 위문하곤 했는데 가슴이 전매 특허인 제인 맨스필드, 'Paper roses'의 아니타 브라이언트, 'A certain smile'의 자니 마티스, 70년대에는 'Kiss and say goodbye'의 맨해턴스 등이 다녀갔고 한 때는 엘비스 플레슬리가 왔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낭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내한 공연은 오로지 미군 장병들만을 위한 것이었기에 내국인이 관람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로 인해서 미군들이 얼마나 쇼를 좋아하는지 알게 됐고 더불어 '미8군 쇼'가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4. 맘보등 춤 열풍 불어

사회가 차츰 안정되면서 미군에 의해 공수돼 온 부기우기 리듬과 차차차에 편승한 <서울부기>, <노래가락 차차차> 등이 나오면서 우리 가요가 점차 외국인의 리듬에 동화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1955년 쿠바의 한 나이트클럽의 밴드 마스터 페레즈 프라도가 창안한 "우"하는 독특한 소리와 함께 봉고 등 타악기를 수반한 라틴 리듬인 맘보의 물결이 세차게 불어 왔다.

'Mambo no 5', 'Mambo no 8', 'Patricia', 'Bumble bee mambo', 'Elcumbanchero', 'Mambo jambo' 등 일련의 히트곡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페레즈 프라도의 일명 <체리 핑크 맘보 >로 알려진 'Cherry pink and apple blossom white'의 위력은 대단해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장면에서도 유한 마담이 캬바레에서 춤추는 신에서 이곡이 배경 춤곡으로 흐를 정도였다.

이렇듯 맘보의 열풍은 사교적인 댄스홀 캬바레를 등장시킨다.

화신백화점, 미도파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전신인 동화백화점 옥상에는 카바레가 생겨 장안의 유한 마담을 유혹했으며 이로 인해 가정파탄아 일어나는 일도 생겼다.

맘보 춤의 유행은 이에 그치지 않고 패션에까지도 영향을 줘 바지 통이 좁은 맘보바지가 여성들한테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 '하녀'에서 그녀가 부른 역시 맘보 붐에 편승해 인기를 끌었다.이 맘보의 유행은 트위스트 춤이 나오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한편 캬바레에서 지루박 춤이 인기를 끌었는데 역시 영화 '피크닉'에서 윌리엄 홀덴과 킴 노박이 췄던 춤으로 정확한 명칭은 '지터벅'이 맞는 말이다.



5. '미8군 쇼' 출신의 스타들

50년대 '미8군 쇼'가 한창 절정을 이뤘을 때는 전국의 미8군산하의 클럽수가 자그만치 264개가 있었으며 이때 미8군이 우리 연예인에게 지불하는 돈이 월평균 8만~12만달러로 연간 무려 120만달러나 돼 당시 우리나라가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100만달러 안팎이었음을 감안할 때 '미8군 쇼'단체의 수입은 우리 경제에 크게 한 몫하던 시대였다.

이렇듯 당시 '미8군 쇼' 무대는 황금을 캐는 노다지였기 때문에 여기 입문하려는 연예지망생이 몰려 들었고 지원자가 너무 많아 미군 심사위원 입회하에 오디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절차가 동원될 정도였다.

'미8군 쇼'로 성공한 인물로 첫 손가락을 꼽는 김시스터즈가 있다.

이난영의 자제인 숙자,애자,민자로 구성된 이들은 당시 인기있는 앤드류 시스터즈, 맥과이어 시스터즈의 노래를 잘 불러 미군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녀들은 노래뿐만 아니라 트럼펫, 색소폰, 밴조 등 악기까지 직접 다뤄 미군들을 열광시켰으며 마침내 명성이 미국에 까지 알려져 밥 호프의 위문단을 따라왔던 매니저 톰 볼의 주선으로 1958년 팝의 본고장인 미국 무대에 진출해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 'Charlie brown'을 리메이크시켜 국내 가수로서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기록을 수립했다.

김시스터즈의 성공에 힘입어 우리에게는 <나 하나의 사랑 >으로 알려진 송민도가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 을 번안한 <눈물의 왈츠 0>를 불렀는데 6.25이후 최초의 팝송 번안곡이다.

<검은 장갑 1>의 손시향, <검은 상처의 블루스 >의 김치 캐츠, 평소 패티 페이지를 좋아해 이름까지 패티로 정한 패티 김이 8군 무대에 나섰는데 패티 김의 단골 래퍼토리는 'Padre' 와 'Till' 이었다.

그런가하면 당시 미군들에게 에임스 브라더스가 인기가 있자 그들을 흉내낸 블루벨즈가 에임스 브라더스의 노래 'You,you,you' 와 <뒷골목의 말광량이 아가씨 designtimesp=2907>로 잘 알려진 'The naughty lady of shady lane', 'Tammy' 등을 즐겨 불렀고 김 시스터즈의 남동생들인 김 보이즈가 인기 있었으며 김광수, 노명석, 송민영, 엄 토미, 베니 김, 박춘석, 길옥윤, 여대영, 이봉조 등이 연주인으로 활약했다.



6. AFKN이 팝 음악에 대한 갈증 달래줘

'미8군 쇼'와 함께 국내 팝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AFKN방송을 무시할 수 없다.

6.25 직후인 1951년 6월부터 방송을 시작한 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의 이니셜만 따서 AFKN이라고 호칭함) 은 처음에는 전쟁의 와중이어서 군용트럭으로 전쟁터를 따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방랑자란 뜻의 'Vagabond'란 애칭이 따랐다.

그러다가 휴전협정 이후 미군 주둔지역에 각각 지역방송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KBS 와 CBS, 두개 라디오 밖에 없던 시대로서 이들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는 미국의 대중음악이 AFKN 라디오를 통해 소개되면서 장안의 인테리들이 미군방송을 듣는게 하나의 멋이었다.

그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제니스 라디오가 절대적인 인기로 지금도 청계천 7가의 방산시장내 만물시장에서 가끔 볼수 있는 옛 풍물이다.

AFKN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미국의 팝 뮤직은 LA에 본부를 둔 AFRTS(American Forces Radio & Television Service) 본부에서 특별히 주문한 LP에 최신 팝송을 수록해 전세계 20여개 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국 본토의 인기를 1주일이면 알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청취자가 점점 늘어났고 당시 AFKN을 안들으면 어디가서 행세를 할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비로서 60년대를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민방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팝 프로그램도 자급자족하게 된다.




                                           출 처 : [기타] 대중음악의 뿌리(선성원 저) ; 네이버 limsohyuk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