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1> C레이션


美軍의 야전용 식량… '다방 커피'의 숨은 공로자

고기스튜, 껌, 커피, 코코아, 비스킷, 크래커, 잼, 초콜릿, 콩, 버터, 햄, 소시지, 치즈, 캐러멜. 미군 야전용 식량 C레이션의 메뉴 구색은 주식거리에서 간식거리까지 사뭇 다채롭다.

광복 직후부터 전후 5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군 부대에서 민간에 유출된 C레이션은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이들에게 별미와 특식이기 전에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절박한 생존 수단이었다. C레이션은 조리가 필요 없는 전투 식량.

대표적인 전후(戰後) 소설로 평가받는 선우휘의 '불꽃'에서 C레이션은 단순한 먹을거리 이상의 의미로 등장한다. '그러면 누구를 보고 국궁 재배, 아양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스파씨바 그라스나야 아르미아(고맙소 붉은 군대) 또 그렇지 않으면 어린애 같은 경탄, 원더풀 C레이션.' 여기에서 C레이션은 직접적으로
미국을 상징할 뿐 아니라 광복 및 전쟁 이후 우리 사회상과 이념, 정치 지형도까지 폭넓게 함축한다.

그런가 하면 궁핍의 화가 이중섭과 C레이션의 인연도 각별하다면 각별했다. 이중섭의 말년을 가까이서 지켜본 시인 김광림은 이중섭이 변변한 그림 그릴 데를 마련할 길이 없어 장판지에까지 손대고 있을 때, 자신이 C레이션에 들어 있는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 은박지를 모아다 주었다고 회고한다. 럭키스트라이크의 '럭키'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이중섭의 비운의 삶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C레이션이 우리 현대 회화예술에 뜻하지 않게 기여했다고 할까.

한편 일제강점기 때도 커피가 들어와 소비되기는 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이 생전 처음 커피 맛을 보게 된 것은 C레이션에 들어 있는 인스턴트커피를 통해서였다. 우리나라 커피 문화가 오랜 기간 인스턴트커피, 일명 다방 커피 일색이었던 것에는 바로 C레이션 커피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설이다.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로부스타 품종이 인스턴트커피의 원료로 많이 쓰이는데, 로부스타 품종 커피의 비중이 우리나라에서 압도적인 현실도 C레이션 커피의 영향이라 할 수 있는 셈.

C레이션이 있다면 A와 B레이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있다. A레이션은 가공 조리해야 먹을 수 있는 냉동 원재료다. 황석영의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탑'(塔)에서 주인공은 '냉동 창고가 있는 A레이션 창고 앞의 상자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오르내렸다'는 문장이 있다. 그리고 B레이션은 가공은 되어 있지만 조리를 해야 먹을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은 2008년. 조선일보가 옛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추억 엽서'를 띄웁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잊을 수 없는 삶과 문화의 흔적들. '국민교육헌장' '상이용사' '학도호국단' '채변봉투' 등 시대의 정치·사회적 유산부터 '프로레슬링' '야외전축' '재개봉관' 등 문화적 유산까지. 문학평론가인 김동식 교수(인하대 국문과)와 출판평론가인 표정훈씨가 글을, '광수생각'의 만화가 박광수씨가 그림을 맡습니다.


박일남-엽서 한잔

출처 : 조선일보 200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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