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라 청군, 잘~한다 백군"

- 70년대 추억속 고향 운동회

'국민학교' 시절 가을 운동회 때 여러분은 혹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해보신 적 있으세요?
출발을 알리는 총성을 기다리다가 출발선에서 터질듯한 심장 고동을 느껴보지는 않으셨나요?

기마전과 차전놀이를 하면서 옷이 찢기고 얼굴이 할퀴는데도

상대편을 땅바닥에 넘어뜨린 뒤 목청껏 함성을 내지르며

짜릿한 쾌감을 느껴보신 적 분명 있으시죠~?



덤블링을 하는 아이들. 사진들은 1972년 고향 학교 가을운동회 광경


요즘 운동회에서 가장 흔한 광경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 꽁무니를 쫓는 젊은 부모들입니다. 

그날 저라고 특별히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달리기와 단체게임에 참가한 아들녀석을 무리 중에서 찾아내느라 진땀을 흘렸거든요! 

트랙 안팎에 장사진을 이룬 학부모들 틈에서 한 시간여 오두방정을 떨면서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100미터 달리기의 결승선은 마치 엄마 아빠 사진사들을 위한 포토라인 같았습니다.

운동장으로 쏟아져나온 학부모들과 제멋대로인 아이들이 뒤엉켜버려

운동회를 진행하는라 땀을 뻘뻘 흘리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외려 안쓰럽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날 운동회의 의미가 퇴색된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즐거운 하루이니까요. 

그 아이들의 진지한 눈빛에서 30여년전 저의 시골운동회 모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요!


시골운동회 차전놀이 광경. 장수들 손에 저마다 칼이 들려있다.

차전놀이는 견훤군과 궁예군의 싸움을 빗대 만든 민속놀이라고 한다

그 시절,

봄소풍과 가을소풍 때도 그랬지만 가을운동회를 앞둔 날이면, 아이들은 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들이랑 운동회에 가져갈 오재미(?)와 덧버신을 만들어 놓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혹시 내일 비나 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몇 번이고 이불밖으로 나와 엄마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엄마, 내일 비 안오지?"
"아이구, 욘석아 걱정 말고 잠이나 푹 자렴!" 

 


드디어 운동회 날 아침, 둥근 해가 떳습니다. 

어머니가 짜투리 천으로 만들어준 멋진 청군, 백군 띠를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동네 아이들과 학교로 내달립니다. 

학교가 아직 저 먼발치인데도 벌써 웅성웅성한 기운이 전해져옵니다.

학교 스피커에서는 찢어질듯한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국기가 펄럭대는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설 때

그 야릇한 흥분. 어린이 악대부의 서투른 연주도 그날만큼은 아이들의 흥을 돋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골운동회는 결코 까까머리 아이들만의 축제가 아닙니다. 

마을대항 운동회이자 요새 말하는 지역축제이기도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이날 만큼은 손주녀석 달음박질과 노래자랑,

갖가지 민속놀이를 구경하러 풀먹인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마실을 나섰습니다.

운동장 앞쪽에 자리한 내빈석에는 면장님과 지서장님, 농협조합장님,

또 예비군대장님 등 지역 유지들이 천막 응달아래 폼을 잡고 앉아있습니다. 


오전에 진행되는 고학년 형들의 덤블링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볼 만한 광경이었던 거 같습니다.

3층, 4층까지 인간탑을 순식간에 쌓아올리는 형들의 고난도(?)

솜씨에 1,2학년 꼬맹이들은 박수와 함께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졸업앨범 속에서 

후둘거리는 말라깽이 다리들을 보면서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요? 

병아리 아이들이 던진 오재미에 간짓대 위에 달린 광주리가 터지고나면

오색 종이가루와 함께 '새마을 정신'이라는 긴 광목이 쏟아져 내리면

'야~' 하고 병아리들의 함성이 터져나옵니다.

 


가을운동회를 위해 덤블링을 가르치신 선생님(왼쪽)의 엄한 모습과 오른쪽 끝에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학생의 진지한 모습이 특히 인상적으로 보인다.

 
운동회날 점심은 오늘날 부페식보다 더 맛있는 진수성찬이 차려집니다.

찐옥수수며, 찐계란, 찐밤,

그리고 고구마... 거기다 찰밥에다 귀한 토종닭도 한마리 고와왔습니다.

꽁보리밥에 이골이 난 시골 아이들은

이날만큼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을 나눠먹으며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오후 경기 시작은 아마도 여자 아이들의 소고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네 아이들에게 가을운동회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기마전과 차전놀이였지요.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

청백군간의 응원전이 점차 뜨거워져 이른바 '삼삼칠박수'도 점점 커지고 빨라집니다. 

"이겨라, 백군." "잘한다 청군" 응원기를 펄럭거리는  호랭이 같이 눈을 부라리면

아이들은 '쾍쾍' 소리를 더 지르며 분위기를 맞춥니다. 

차전놀이는 집단 전쟁놀이로 머리꾼들의 격렬한 몸싸움 때문에 부상자가 생기기도 한다.


장수와 머리꾼, 동채꾼, 놀이꾼이 혼연일체가 되어 싸우는 차전놀이는

하도 몸싸움이 격렬해 부상자가 생기기도 합니다. 

 

마치 싸움을 방불케 했던 기마전에 이어 운동회 마지막 피날레는 

청군백군 간의 계주. 실재로는 마을 대항 계주입니다.

어떤 시골운동회건 그날 승부는 청백계주에서 결정되는 것이 상례일 겁니다. 

 

오전부터 엎치락뒤치락 했던 점수도 결국은 이 계주에서 결판이 납니다.

계주 경기에 나선 아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영웅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운동회가 끝난 뒤로 내내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계주가 시작되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르신들도 트랙주변으로 몰려나오 혼연일체로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마지막 승리팀이 청군이든, 백군이든 아이들에게 가을운동회 날은 늘 너무나 짧은 하루였습니다.

해가 서산에 거릴고 아이들의 그림자까지 길어지면 각자 집으로 돌아서지만, 

저마다 손에는 연필 몇 자루와  월계수잎 무늬와 '賞'자가 선명한 공책 한두 권씩이 들려있었구요.


책가방이 귀한 시절 너나 없이 허리에 동여매고 다니던 책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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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음악대 / 따따따 …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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