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국기하강식


애인과 키스 도중 애국가가 울린다면?

"1982년은 그런 시절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의 암기에서부터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사람들을 '차렷' 시키던 국기하강식, 시도 때도 없는 국기에 대한 맹세, 이 또한 빠지면 섭섭한 애국가 제창(4절까지)." 박민규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전하는 그 때 그 시절을 어느 고교생의 하루로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 애국조회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하굣길 동네 삼류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 스크린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기립했다가 착석. 영화 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마침 오후 5시(또는 6시)가 되니 관공서나 학교 스피커에서 나오는 애국가에 맞춰 부동자세. 집에 와서 TV를 시청하다 방송 종료 시각이 되자 화면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애국가. 꾸벅꾸벅 졸다가 자동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오늘의 마지막 국민의례를 행한다. 하루에 네 차례 국민의례를 거행한 애국 시민이 되는 셈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 국기하강식이 벌어지면 멈춰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동차 안에 앉아가는 사람은 차 밖으로 나와 기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애인과 키스 도중 국기하강식이 벌어지면 키스를 중단하고 기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국기가 보이지는 않고 애국가만 들리면 어느 방향으로 서야 하나? 각각의 다양한 상황마다 국기하강식에 대한 고민도 다양했다.
이런 고민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한 정답을 말하자면, '차량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은 차량을 정지하고 앉은 채 차렷 자세를 취한다.' '국기는 볼 수 없지만 주악은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주악이 들리는 방향을 향하여 차렷 자세를 취한다.' ('누구나 알아야 할 생활예절') 국기하강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 갈길 가는 사람을 본 '애국시민'들은 속으로 '저런 불온한 인간이 있나!' 질타하던 그 시절이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피어나던 꽃들이 고개 숙이고 꿀벌처럼 뛰어가던 아이들도 일제히 멈춰 서서 경례를 붙인다.…멀리 날아갈 준비에 부푼 아이들아, 움직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바람을 놓아주고, 들풀이 고개 들어 온 세상 풀씨를 날린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무궁한 발전을 약속받은 아이들아, 이제 보이느냐, 국기 게양대 위로 너희가 날아야 할 푸른 하늘이." 수원 창현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시인 나희덕이 1988년에 발표한 '경례하는 아이들'의 일부다. 1989년 1월에 국기하강을 위한 라디오방송과 영화관에서의 국민의례가 폐지됐고 국기하강식은 공공기관 및 학교 자체방송을 통해서 실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실상의 폐지였다.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김영동-애국가

출처 : 조선일보 2008.08.18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