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상이용사


나라 위해 '전쟁의 상처' 짊어진 그들

 

오른팔이 잘려 갈고리를 대신 단 상이군인이 와서 술하고 돈을 내놓으라며 번득이는 갈고리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둘러대고 떼를 부린다. 연씨는 상이군인을 이렇게 다독거린다. "왜 비굴하게 그들에게 당신들 때문에 불구가 됐으니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하는 구차한 손을 벌린단 말이오? 총대 메고 싸우던 시절의 기백으로 되돌아가 남은 수족이나마 성한 사람들보다 갑절로 더 움직이면서 장하게 살아봅시다." 김소진의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의 한 대목이다.

팔에 갈고리를 달거나 의족을 하고 목발을 짚기도 한 상이용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부정적이다. 남의 집 대문을 무단으로 밀고 들어와 대청마루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다짜고짜 돈을 요구한다. 시내버스 안에서 갈고리로 의자나 손잡이를 보란 듯이 탕탕 두드리며 물건을 강매한다.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며 식당이나 유흥업소에서 술 달라 밥 달라 생떼 쓰며 무전취식한다. 아무 상점에나 들어가 돈을 갈취한다.

이런 상이용사의 갈고리 손은 폭력, 행패, 생떼, 무법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상이용사에 대한 부정적 편견 탓에 취직이 여의치 않아서,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다는 거짓말을 하고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는 상이용사도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의 상흔을 평생 짊어지게 된 상이용사들의 일리 있는 항변, 우리가 귀담아 듣지 않았던 항변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우리의 생활을 정부가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고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으니 구걸이라도 해야 했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으니 때로는 거칠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가? 바로 당신들과 나라를 위해서다. 전쟁 통에도 온전한 몸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냉대하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6·25 전쟁뿐이겠는가.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와 6·25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 아들의 '수난이대'(하근찬 소설)가 있는가 하면, 월남전에서 부상당하거나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상이용사도 있다. 박진성 시인의 '밤나무에 묻다'에 나오는 '명수 아버지'가 더 이상 없기만을. "절름발이 명수 아버지는 간암 선고 받고 목매달았다. 신촌리 윗말 밤나무에 매달려 밤이 되었다. 어린 내 볼에 그가 얼굴 부비면 밤송이처럼 환하게 열리던 공포, 한쪽 다리에 월남 원시림 품고 그이는 금강으로 갔다."

물론 전시(戰時)가 아니더라도 평상시 작전이나 훈련 수행 중 큰 부상을 당해 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베이징에서 열릴 장애인 올림픽에 탁구 대표선수로 참가하는 해병대 출신 상이용사 이해곤(55) 선수. 1988년 서울 대회 이후 여섯 번째 참가하는 그가 다시 한 번 금메달의 영광을 누리기를!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명상음악-산

출처 : 조선일보 200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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