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야외전축


'야전' 하나에 야유회 춤판은 무르익고…

"고1 여름, 무슨 수로 거금 1만원을 마련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1만원을 투자하여 '야전'을 샀다. 별 좋은 날이면 우리는 그것을 들고 근처 야산으로 어슬렁어슬렁 몰려가곤 했다. 한 놈은 적당한 술을, 다른 한 놈은 적당한 안주거리를, 또 다른 놈은 야전과 LP빽판을 들고.…우리는 몇 잔의 취기에 '야전'을 틀어놓고는 몸을 놓아버렸다. 별 좋고 술 좋고 친구 좋고 음악 좋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건가." 작고한 문화평론가 이성욱(1960~2002)이 회고한 '야전' 시대 어느 별밤 이야기다. (유고집 '쇼쇼쇼')

1954년생 가수 김창완도 야전 세대의 일원이었다. "'나쇼날 야전'하나 있으면 온갖 야유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왱왱거리는 야전음악에 맞춰 어디서 보고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림보라 하여 긴 작대기 밑으로 개구리 배 까듯 누워 두 발로만 지나가는 춤을 추기도 했다." ('이제야 보이네')
야전은 '야외전축'의 줄임말로 포터블 전축으로 불리기도 했다. 야외에 휴대하고 가서 틀어놓기 좋은 전축인 셈. 70년대 고고 열풍의 바탕에 야전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야전은 LP 음반보다 약간 더 넓고 높이도 10~15센티미터 정도여서 휴대하기 편했지만, 모노 스피커 하나에 볼륨 스위치와 음반 회전 조정 스위치만 있어 음질을 따질 형편은 못되었다. 야전을 야전(野戰)에 투입하려면 당연히 배터리가 많이 필요했다.

야전 최대 인기 뮤지션으로 4인조 밴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줄여서 C.C.R을 꼽는 이들이 많다. 디자이너 C(50)씨가 C.C.R의 '누가 비를 멈추게 할는지'(Who'll Stop the rain)를 치켜세우며 같은 밴드의 '헤이 투나잇'(Hey Tonight)을 흥얼거리는 가운데 동년배 출판편집자 K씨는 박스탑스(Box Tops)의 '편지'(The Letter)를 얘기하고, 옆자리 기업체 간부가 아치스(Archies)의 '슈거슈거'(Sugar Sugar)를 꼽으니 술집 사장님이 슬쩍 토미 로(Tommy Roe)의 '디지'(Dizzy)를 튼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국산 컴포넌트 오디오 보급, FM 라디오 음악방송 유행, 음질 좋은 라이선스 음반 보급 등이 이루어지면서 야전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바야흐로 귀에 꽂고 듣는 워크맨(본래 소니의 등록상표)의 시대가 개막될 참이었다. 시인 유하가 그 시절에 바친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송창식-고래사냥

출처 : 조선일보 2008.08.09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