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삐라의 추억  


일제 - 6·25 - 남북대치 기간 심리전 수단으로 활용
北, 남쪽 체제 비방 많고… 南, 경제발전 홍보가 주류
2000년대 사라져… 정선군 ‘추억의 박물관’서 전시

30대 중반을 넘은 이들은 초등학교 시절 ‘삐라(전단)’를 주워 경찰에 신고한 뒤 학용품을 받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삐라는 북한이 체제 선전을 위해 뿌린 조악한 삽화와 문구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삐라는 전단이나 벽보란 뜻의 영어 ‘bill’을 일본에서 ‘비루’로 읽은 것이 국내로 유입돼 ‘삐라’가 됐다는 설이 있다. 삐라는 6·25전쟁 때 남북이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했고, 1990년대까지도 서로 수많은 삐라를 뿌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심리전 부대인 선무반(宣撫班)이 항일무장단체를 대상으로 한 삐라를 뿌리기도 했다.

이처럼 삐라는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쳐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4일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이 공개한 희귀 삐라 500여 점은 삐라의 사료적 가치를 짐작하게 한다. 강원 정선군 ‘추억의 박물관’은 3월 22일∼6월 30일 이 삐라들을 전시한다.

이번에 나온 삐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20, 30년대 일본군의 승?를 위해 조선인이 애국하는 모습을 선전한 전단이다.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 회원들이 일본군 군복을 바느질하는 사진 옆에 ‘총후를 지키자!! 부르짖는 반도의 열성’이라고 적혀 있다. 총후는 후방 지역을 뜻한다. 일본군이 만주 일대 중국의 항일무장단체나 태평양전쟁이 치열했던 뉴기니 섬과 필리핀의 연합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도 있다.

6·25전쟁에서는 심리전과 선전전의 비중이 커지면서 삐라가 엄청나게 뿌려졌다. 당시 삐라는 대부분 상대편의 귀순이나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북한이 뿌린 ‘US Airman writes to his buddies’란 삐라는 미군 포로가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연합군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연합군이 뿌린 삐라 중에는 ‘활짝 웃고 있는 북한 포로들의 사진’을 담은 것도 있으며, 중국 공산당 정부가 한국 사람의 쌀을 빼앗아 인도인을 먹여 살린다는 심리전을 펼친 것도 있다. 이런 삐라들은 ‘safe conduct pass’ ‘안전보장증명서’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 삐라를 지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의미다.

전쟁 이후에도 수많은 삐라가 뿌려졌다. 1970, 80년대 초 북한은 삐라를 통해 1974년 건립된 인민문화궁전과 평양 등을 선전했다. 이후 북한 삐라의 내용은 남한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비난으로 바뀌었다. “총 칼부림과 사람잡이밖에 못 배운…” 등 입에 담지 못할 인격 모독이 많았다. 북한의 주체사상 학습 조직이 한국군 내에 결성됐다는 등 거짓 이념 공세도 이 시기 삐라의 특징.

한국이 북한에 뿌린 삐라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홍보하는 게 대부분이다. 1980년대에는 현대식 주택, 깨끗이 정돈된 거리 사진을 담거나 ‘여름이 오면 인생은 즐거워라’라는 제목으로 백사장에서 휴가를 즐기는 ‘남녘 인민들’을 보여주는 삐라가 많았다. 1990년대 초에는 ‘대한민국은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 등 경제 발전을 강조했다.

진용선 소장은 “냉전의 상징인 삐라는 1991년 남북 고위급회담 남북합의서에 ‘삐라 등의 방법으로 상대를 비방, 중상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은 뒤 점차 줄어들다가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2008년 3월 5일자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