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쥐잡기 운동


"쌀을 지켜라"… 국가가 벌인 쥐와의 전쟁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선생을 할 때나 다 쥐 잡는 날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쥐를 잡아서 꼬리를 잘라 학교로 가져가야 했다. 아이들마다 한 달에 몇 마리씩 할당량이 있었다. 그때는 참으로 쥐가 많고 크기도 했다. 쥐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시궁창에서 죽은 쥐를 건져 꼬리를 잘라 말리곤 했다."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시인 김용택이 전하는 쥐꼬리 수난사다.

1966년 3월 2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쥐를 잡아 꼬리를 보건소로 가져가면 마리당 5원씩 보상하기로 했다니, 보상금 노린 쥐사냥꾼도 없지 않았을 듯. 보사부와 농수산부는 물론 사실상 전 정부 차원의 국가사업이었고 가장 강조된 사항은 '일시에 다 같이 잡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쥐약 놓는 날짜와 시각까지 제시됐다. 쥐약은 각 동네 반장 이장을 통해 무상으로 공급됐고 '미끼는 부락 공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쥐 잡기가 정부 주도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라지만 군사작전을 방불케 조직적 거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고, 보건위생보다 식량자급 목적이었다. 1970년대 초 통계로 우리나라의 쥐를 1억 마리로 쳤을 때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연간 32만t에 달했다. 1970년 1월 26일 시작된 제1차 쥐 잡기 사업에서 '4300만 마리를 잡아 106만6천 석의 양곡 손실 방지 효과를 올렸다'는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가히 놀랄 만한 효과다. 각 도별로 마릿수까지 할당 지시했던 그 시절이다.

매년 봄가을 학생들은 쥐 잡기 표어와 포스터를 만들고 쥐꼬리 수집하느라 바빴다. 쥐 잡기가 어디 쉽기만 했을까. 쥐를 많이 잡는 쌀집에서 쥐꼬리를 얻거나 오징어 다리를 불에 그슬리거나 재를 묻혀 발로 비벼 쥐꼬리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물에 불리거나 삶아 말리고 흙에 문지르기도 했다. 오징어 다리에 물감을 묻히는 위조 예술작품(?)마저 있었다.

그렇게 잡은 쥐에서 가죽을 모아 가공한 수출품도 있었으니 지금은 전설이 된 일명 '코리안 밍크'다. '대한뉴스' 1972년 제868호를 보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표창한 수출유공업체 한국모피공업은 "못 쓸 것으로 알려진 쥐가죽을 여자 오버코트, 모자, 핸드백 등 각종 옷감과 장신구 자재로 가공하여 올해 25만 달러 수출을 목표로 수출 진흥에 힘쓰고" 있었다.

시인 황인숙(50)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쥐 잡기에 대한 작문을 하면서 쥐덫에 잡힌 쥐가 죽음을 당하는 걸 보면서 느낀 불쌍함을 썼다고 한다. ('인숙만필') 쥐 잡기 장려 취지의 작문 시간에 쥐에 대한 연민을 글로 적은 어릴 적 시인의 마음씀이 천생 시인이다.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쥐잡기송

출처 : 조선일보 2008.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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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가 한 마리가 쥐가 두 마리가
쥐가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가
쥐가 여섯 마리가 쥐가 일곱 마리가
쥐가 여덟 마리 아홉 열 마리



모두 열 마리 아니 스무 마리
아니 서른 마리 마흔 마리 쉰 마리
아니 예순 마리 아니 일흔 마리
아니 여든 마리 아흔 마리 백 마리



그때 야옹~ 야옹~ 고양이 나왔지
그때 야옹~ 야옹~ 고양이 화났지




그때 도망갔지 쥐가 도망갔지
쥐가 어디까지 도망갔나 나도 몰라

옳지 쥐구멍이지 옳지 쥐구멍이지
모두 쥐구멍에 들어가서 숨어 버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