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래헌의 아침은 연두빛입니다. 신록의 가지 끝에서 빛나는 푸름 햇살이 문을 열게 하고, 이슬에 젖은 풀꽃향 기가 숨길을 가로막습니다. 숲에서는 꾀꼬리와 까치가 울고 비둘기가 구구구구 짝을 부릅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뻐꾸욱 뻐꾸욱…”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해마다 이무렵에 듣는 뻐꾸기 울음소리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 숙연해집니다. 그것은 엄마에 음성 같은, 영원한 모음(母音) 같은 그런 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고 늘 새롭기만 합니다.

   그 아득한 소리가 들려오면 가끔 일을 하다가도 멈춥니다. 그리고 벽에 기댑니다. 기대는 것이 이때처럼 아늑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고 기대지 않는 것이 사원의 생활 규범이 되어 있지만.

   마음은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그저 무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싶을 뿐입니다. 정복(淨福) 같은 것을 느낍니다.

   뻐꾸기 울음쯤 듣고 뭐 그리 답지 않게 엄살을 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어디 단순히 두견과에 속한 한 마리의 새소리만이겠습니까. 그 소리가 있기까지는 이슬이 밴 5월 아침과 맑은 햇살이며 풀꽃 내음뿐 아니라 지난밤의 별과 두견새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하모니입니다.

   그 아득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존재에 대해 새삼스레 연대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합일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누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나는 확신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 눈에 띄는 영역보다 뚜렷하게 비쳐오고, 영원한 것이 현실적인 것보다 더 가깝게 다가서고 있음을.

   그러나 주말이면 이러한 모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숲속의 향기와 새소리는 놀이꾼들의 확성기와 고함소리, 그리고 트랜지스터 소리에 질식하고 맙니다. 시정(市井)의 찌든 일상에 벗어나 모처럼 자연의 품에 안겨 쉴 수 있는 기회를 대개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버릇과 소음을 동반함으로써 시지포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소음으로 인해 영원한 모음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현대 문명의 어두운 벽입니다. 그러한 소음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데서 울려오는 내심의 소리마저 차단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1970. 5. 20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