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장미의 계절일 수만은 없다. 아직도 깊은 상혼이 아물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는, 카인의 후예들이 미쳐 날뛰던 6월, 언어와 풍습과 핏줄이 같은 겨레끼리 총부리를 마주 겨누고 피를 흘리던 악의 계절에도 꽃은 피는가.

   못다 핀 채 뚝뚝 져버린 젊음들이, 그 젊은 넋들이 무수히 잠들어 있는 강 건너 마을 동작동. 거기 가보면 전쟁이 뭐라는 걸 뼈에 사무치도록 알게 될 것이다. 그것도 남이 아닌 동족끼리의 상잔, 주의나 사상을 따지기에 앞서 겨레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상처가 강 건너 마을만큼이나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6월이 오면 하루나 이틀쯤 겨우 연중행사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마는 가벼운 기억들, 싸움터에서 억울하게 죽은, 정말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이 남긴 마지막 발음이 무엇이었던가를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오늘의 이 사치와 허영과 패륜과 메울길 없는 격차와 단결을 가져오기 위해 그 무수한 젊음들이 죽어간 것인가.

   국회의사당과 행정 부처가 때로는 이 국립묘지로 이동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다. 왜냐면 국가 대사를 요리하는 선량이나 고급 관료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실감케 하고, 나아가 생과 사의 관념적인 거리를 단축시켜 주기 위해서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정치의 탈을 쓴 흥정이나 음모가, 부패나 부정이 그래도 체면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다.

   몇 해 전 의사당 안의 풍경 한 조각.

   바깥 싸움터로 군대를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가장 엄숙한 결단의 마당에서 민의를 대변하는 어떤 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더란다. 아무리 자기 자신은 싸움터에 나가지 않는 다기로 이렇듯 소홀한 생명 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이 비록 가난한 우리 처지로서는 빵과 목숨을 맞바꾸어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졸아서 될 말인가.

   적어도 그들은 가부를 내리기 전에 한 번쯤은 이 침묵의 마을에 와야 했을 일이다. 그 무수한 젊음들이 피를 뿌리며 숨져갈 때 부르짖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던가를 귀 기울여 들어야 했었다.

   전쟁이 용서 못 할 악이라는 것은 새삼스레 인류사를 들출 것도 없다. 어떠한 명분 일지라도 살려는 목숨을 죽이고 삶을 파괴하고 평화로운 질서를 짓밟는 전쟁은 악이다.

   야수처럼 서로 물고 뜯으며 피를 찾아 발광하는 살기 띤 눈이 결코 우리들 인간의 눈일 수는 없다.

   무심한 꽃은 핀다. 하기로 6월이 장미의 계절일 수만은 없다. 아직도 우리 조국의 산하에서는.
 
1970. 6. 12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