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나무들이 젖고 있다. 새들은 깃을 찾아드는데 숲은 저만치서 부옇게 떨고 있다. 나직한 빗소리를 들으면 앓고 싶다. 시름시름 앓기라도 하면서 선해지고 싶다.

   성해서 어울릴 때보다 혼자서 앓을 때 문득 자기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언어가 문을 닫은 침묵 속에서 내 깊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 안에서 내 얼굴을 본다. 그림자를 이끄록 휘적휘적 지평선 위로 일상(日常)의 내가 걸어가고 있다. 저 그림자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픈 상처가 도지듯 원초적인 물음이 고개를 든다.

   오늘의 인간은 소음 속에서 살고 있다. 자리에서 눈을 뜨기 바쁘게 소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색다른 소음을 싣고 조석으로 찾아드는 지면(紙面),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채대는 전화의 벨소리, 몇 시에 어디 가서 누구와 만나 세상일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고, 더러는 서로서로 남의 흉도 좀 보아야 한다. 문명의 이기(利器)에서는 연방 무슨 약을 먹지 않으면 제 명대로 못 tf 테니 알아서 하라고 눈을 부라리고 협박이고, 이쯤되면 인간이 소음 속에 묻혀 있는 게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하나의 소음이다.

   사람들은 가까스로 소음에서 벗어날 만하면 외롭다면서 안절부절못한다.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일상적인 내가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 순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마음의 바탕인 침묵을 감내할 수 없어 입술로 살려고 나들이를 한다. 이래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마련한 소음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언어는 사실상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 하루에도 무수히 의미 엄ㅂㅅ이 주고받는 우리들의 대화가 시장의 소음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말은 장엄한 음악처럼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사라져간다. 이러한 침묵은 물론 언어에 의해서 그 의미와 존엄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만.

   침묵의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조차 들을 수 없도록 청각의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소음을 찾아 피로회복제를 마셔가며 열심히 헤매고 있다. 그러나 소음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는 피곤을 다할 뿐이다. 이래서 인간의 영역은 날로 메말라간다.

   소음이 식민지(植民地)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대기 오염에 못지않게 우리들 인간의 영원하고도 본질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비가 내린다.

   강변에 드리워진 곡마단의 포장이 젖고 있겠다.

   날이 들면 벗을 만나, 너무도 싼 그 입장료를 이번에는 곱을 치르고, 보다 만 구경을 마저 할까보다.
 

1970. 6. 12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