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과 더불어 올해도 어김없이 사월 초파일은 다가왔다. 이날을 기리기 위해 비록 언어와 습관은 다를지라도 온 세상은 바야흐로 연둣빛 신록처럼 수런거리고 있다. 수많은 인간 가족들이 이날을 기억하고 축복하는 것은 단순히 불교 교조(敎祖)의 탄생을 두고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의 존재 양상과 인간의 길을 열어 보인 여래(如來)가 오신 날이기 때문이다.

   여래란, 자각을 통한 진여(眞如)가 미망(迷妄)으로 헤매는 중생의 세계에 도래했다는 뜻. 진리가 중생의 세계에 왔다고 하는 말은 즉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그 대화를 통해서 중생이 구제되었다는 의미이다.

   2천5백여 년 전 인도 석가족 출신의 한 수행승이 그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석가여래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란 말은 폐쇄적이거나 정지적인 상태가 아니고 개방적이요 활동적인 참여의 인격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지혜에서 자비에로의 전개, 이것이 곧 여래의 면목이다.

   ‘중생은 자기중심적인 행위에 의해서 몸을 받고, 부처님이나 보살은 청정한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몸을 나타낸다.’라고 불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대비원력은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 아래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 아집을 떠난 순수한 나와 너의 유대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여래를 ‘길을 가리키는 나그네’로도 비유한다. 나그네에겐 일정한 처소가 없다. 미망의 중생이 사는 곳이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두루 찾아다닌다. 만나는 사람에게 인간의 길을 말한다. 온갖 고뇌의 집착에서 해탈한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두뇌에서 가공된 회색의 이론이 아니라 넘쳐흐르는 원천이었다. 너와 나를 맺고 있는 생명의 줄기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여래의 본원(本願)이다.

   만약 그에게 이러한 대비원력이 없었던들 그는 보리수 아래 앉아 홀로 정각(正覺-올바른 깨달음)의 기쁨만을 누리면서 입 벌려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오늘의 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의 출현은 오로지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일밖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탄생의 본질적인 의미는 육신의 출생이 아니라 미망(迷妄-미혹)의 결별에 있어야 한다.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전생(轉生-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남)하는 일이다. 나 혼자서 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과 함께, 이웃이 없는 나의 존재는 무의미한 것.

   오늘날처럼 인간의 자각이 절실해진 때가 일찍이 있었던가. 비인간화의 전도된 문명 속에서 우리들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등불을 밝히는 일이다. 그 빛으로 우선 인간의 발부리를 비추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난 것이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서로 믿고 의지해 사랑하며 인간의 길을 함께, 갈 수 있도록 밝혀야 할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것은 그가 몸소 보였던 대비원력이 오늘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분화(分化)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사 억만 개의 등불을 대낮같이 밝힌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세계는 암흑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신 날’은 마땅히 새 부처님의 ‘오시는 날’을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이다.

1970. 5. 7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