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解除) 다음 날 새벽, 첫차를 타기 위해 동구(洞口)길을 걸어 나올 때, 아, 그것은 승가에서나 느낄 수 있는 홀가분한 단신(單身)의 환희, 창공에 나는 학의 나래 같은 것.

   새벽달의 전송을 받으며 걸망을 메고 호젓이 산문(山門)을 벗어나면 나그네는 저절로 활개가 쳐진다. 90일 안거(安居)는 이때를 위한 움츠림인가. 마냥 부푸는 가슴, 영원한 머시매들의 설레는 몸짓, 만약 걸망 대신 가방을 들었거나 두 번째 차편이라면 그 해방감은 절반쯤 꺾이리라.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쁜 것이다. 족행신(足行神)의 사촌쯤 되는 ‘걸망귀신’은 해제일이 가까워져 오면 빨래를 한다, 누더기를 꿰맨다고 하여 벌써 설레기 시작이다. 더러는 흩어진 도반들에게 사연을 띄우기도 하면서.

   우선 첫 기항지는 해안선, 바다가 가까운 아란야(阿蘭若-한적한 수행처라는 뜻으로, 절, 암자 따위를 이르는 말). 식성을 알아주는 허물없는 도반을 찾아가 짐을 푼다. 거기에서 싱싱한 새봄의 미각을 즐긴다. 겨우내 신 김치가 지배하던 무표정한 식탁 대신 바다에서 건져온 싱싱한 해초, 생미역 쌈을 싸면 문득 해조음(海潮音)에 섞여 갈매기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 있는 길의 나그네는 노상 바쁘다. 이내 길을 떠난다. 이래서 거리에는 한동안 먹물 옷이 오고 가리라. ‘진정한 해제자란….’ ‘생사가 신속하니….

   준엄한 훈시는 잠시 다음 결제(結制)로 미루자. 그새 초하루 보름마다 익히 들어 왔으니 사문(沙門)은 해제 기간이라 해서 거저 노는 것은 아니다. 행각을 통해 널리 보고 듣고 또한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대지에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쏘여야 한다. 저만치 앞서 달리는 현대의 속도로 감촉하게 하라. 까맣게 잊어버린 시간을 의식하게 하라. 닫힌 일상과는 너무나 사이가 뜬 그 흐름에 부딪혀보라.

   그리하여 독선적이고 옹졸해지기 쉬운 경직된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지금 우리는 어떠한 세계 안에 살고 있는가를 우물 밖 시력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해제 일미(解除一味)는 결코 결제의 정진과 무연하지 않다. ‘길’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로다.
 
1968. 2. 25.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