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유시가 모음집 Время Наших Песен 22
러시아 음유시인들을 '바르디'라고 부릅니다. 이 음반에는 바르디의 히트작만 22곡 수록한 <바르디 베스트> 모음집입니다. 우리나라 70년대 포크 음악처럼 기타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하고, 모든 곡을 직접 쓰는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입니다. 6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주로 많이 불리어졌는데, 당시 세태를 풍자하는 노래나 정치색이 짙은 노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일상을 주제로 모두 함께 따라 부를 수 있게 만들어졌군요. 90년대 후반,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옛 향수를 그리워하던 대중으로부터 다시 큰 사랑을 받게 되고, 이 음반도 그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니끼찐 부부, 수하노프, 미짜예프, 율리 김, 샤오프 등 고의 바르디가 부른 히트 음유시가 모음집입니다. 음유(吟遊) 사전적인 말로는 시를 지어 읊으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뜻입니다. 또한 음유시인(吟遊詩人)이란 중세 유럽에서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읊었던 시인이라는 뜻으로 각 지역마다 음유 시인을 부르는 말이 달랐는데,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북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젱거 등이 유명합니다. 12세기 초엽부터 남프랑스에서는 봉건 대제후(大諸侯)들 사이에서 궁정의 귀녀(貴女)를 중심으로 하는 좁지만 화려한 사회가 이루어져, 귀녀숭배와 궁정풍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애의 이념이 생겨났습니다. 기사(騎士)인 시인은 그러한 환경과 이념 속에서 사랑하는 마음속의 귀녀에게 영원한 사모를 바쳐 그것을 때로는 난삽할 만큼 정교한 시형으로 다듬어 작곡하여 그것을 성(城)에서 성으로, 궁정·귀녀를 찾아다니면서 노래불렀습니다. 이러한 시인·기사가 트루바두르, 즉 음유시인입니다. 400여 명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봐도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 그 내용은 일정하며, 결코 보답을 받을 수 없는 귀녀에의 사랑의 탄원과 봉사의 맹세입니다.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마에 키스를 받는 정도가 고작이었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콩솔라멘테'라는 키스의 영예를 간직하기 위해 더 한층 정성을 바칩니다. 그리스도교의 마리아 숭배를 세속적인 사랑에 대체한 것이며, 또한 봉건제의 주종(主從) 관계를 연애 관계로 꾸며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보는 견지에 따라서는 여성 이외의 전쟁과 종교가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겠지요. 어쨌거나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음유시인들의 이 서정시야말로 근세 유럽의 시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가 그 원조이지만, 브라유의 성주(城主) 조프레 뤼델,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 등이 잘 알려진 음유시인입니다. 이 새로운 시의 경향은 북으로 옮아가서 북프랑스에도 퍼지게 되어, 이른바 '트루베르(trouvere)'라고 일컬어지며 음유시인들을 낳게 했으며, 그것들은 더욱 북으로 퍼져, 독일에도 파급되어 많은 미네(Minne:사랑)의 시인을 배출하는 기연(機緣)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음유시인은 미네젱거(Minnesanger)라고 했습니다. 또한 남방의 이탈리아에서는 '트로바토레(trovatore)'의 활약이 매우 컸으며, 기타 영국·에스파냐 등의 근대 서정시의 발생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