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선수가 15라운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1분간의 휴식시간, 그리고 링 한구석에 놓인 의자가 없다면 어떤 선수도 15라운드를 뛸 수 없다.

 

 

저녁이면 1분의 휴식도 없이, 링 한구석의 의자도 없이 15라운드를 뛴 권투 선수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4월의 끝자락이 와도 날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는 변덕스런 날씨에 몸살로 뜨끈해진 몸을 안고 퇴근길에 올랐다. 좀처럼 앉을 자리가 나지 않았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피부에 수많은 바늘이 달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택시를 타던지 아내에게 데리러 오라고 해도 될 것을 이렇게 미련하게 버티고 가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30분도 넘게 흔들린 뒤에야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아가씨가 내렸다.

멀리서 한 아주머니가 사람들을 헤치고 그 자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모르는 척 앉았다.

 

 

버스의 한 구석자리, 그는 12라운드쯤 뛴 권투 선수처럼 녹초가 되어 앉았다.

자신의 뜨끈하고 지친 몸을 받아주는 의자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때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버스의 손잡이도 새삼 고마웠다.

이 작은 것들이 없었다면 그는 구석에 놓인 의자까지 갈 기력도 없이 링 한가운데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세 정류장쯤 지났을 때 그는 아까부터 그를 쏘아보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주머니는 아셨을까? 몸살 기운이 온몸에  퍼졌어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를.

 

그나 아주머니나 1분간의 휴식도 없이, 구석의 의자도 없이 내리 경기를 치른 권투 선수같다는 공감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주머니는 그보다 한 라운드 더 뛴 선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글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김미라, 쌤앤파커스) 中에서

?
  • ?
    하은 2017.02.16 01:59

    정말 그 1분간의 쉼이 없다면 이세상을 살아 가기가 너무 힘들것 같아요.

    그 1분을 쉬었기에 또 다른 사람에게 의자를 내줄 마음도 생겼을 테니까요.

  • ?
    오작교 2017.02.16 09:14

    '쉼'이라는 것,

    우리네 삶에서 최고로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마음의 샘터

메마른 가슴에 샘물같은 글들...

  1. 이 공간을 열면서......

  2. No Image 16Feb
    by 오작교
    2017/02/16 by 오작교
    Views 3813 

    아무 데로 가지 않았던 것처럼 / 나를 격려하는 하루

  3. 휴식도 없이, 의자도 없이 / 김미라

  4. No Image 15Feb
    by 오작교
    2017/02/15 by 오작교
    Views 3798 

    한 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 김미라

  5. No Image 16Dec
    by 오작교
    2016/12/16 by 오작교
    Views 3831 

    우리가 해야 할 기도 / 나의 치유는 너다

  6. 반대로 가라 / 나의 치유는 너다

  7. 사람은 / 나를 격려하는 하루

  8. No Image 23Nov
    by 오작교
    2016/11/23 by 오작교
    Views 3784 

    구체적인 절망의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다 보면

  9. 돌아보니 한여름날의 햇살보다 짧았어요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0. 그들을 거울삼아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11. No Image 22Sep
    by 오작교
    2016/09/22 by 오작교
    Views 3789 

    텍스트에 지친 하루였어요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2. No Image 12Sep
    by 오작교
    2016/09/12 by 오작교
    Views 3341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3. No Image 07Sep
    by 오작교
    2016/09/07 by 오작교
    Views 4078 

    평생을 산다는 것은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4.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사랑이라면 가장 소중한 단어는 가족이에요

  15. No Image 26Aug
    by 오작교
    2016/08/26 by 오작교
    Views 3367 

    과거 속에 나를 가두지 마라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6. No Image 22Aug
    by 오작교
    2016/08/22 by 오작교
    Views 3272 

    널 잊을 수 있을까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7. No Image 22Aug
    by 오작교
    2016/08/22 by 오작교
    Views 3403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갖기 위해서는 /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18. No Image 22Aug
    by 오작교
    2016/08/22 by 오작교
    Views 3320 

    행복의 조건

  19. No Image 11Aug
    by 오작교
    2016/08/11 by 오작교
    Views 3241 

    삶이 뼈를 맞추는 순간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20. No Image 11Aug
    by 오작교
    2016/08/11 by 오작교
    Views 3253 

    당신의 착지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21. No Image 11Aug
    by 오작교
    2016/08/11 by 오작교
    Views 3348 

    생의 필수품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Board Pagination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