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선수가 15라운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1분간의 휴식시간, 그리고 링 한구석에 놓인 의자가 없다면 어떤 선수도 15라운드를 뛸 수 없다.
저녁이면 1분의 휴식도 없이, 링 한구석의 의자도 없이 15라운드를 뛴 권투 선수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4월의 끝자락이 와도 날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는 변덕스런 날씨에 몸살로 뜨끈해진 몸을 안고 퇴근길에 올랐다. 좀처럼 앉을 자리가 나지 않았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피부에 수많은 바늘이 달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택시를 타던지 아내에게 데리러 오라고 해도 될 것을 이렇게 미련하게 버티고 가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30분도 넘게 흔들린 뒤에야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아가씨가 내렸다.
멀리서 한 아주머니가 사람들을 헤치고 그 자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모르는 척 앉았다.
버스의 한 구석자리, 그는 12라운드쯤 뛴 권투 선수처럼 녹초가 되어 앉았다.
자신의 뜨끈하고 지친 몸을 받아주는 의자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때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버스의 손잡이도 새삼 고마웠다.
이 작은 것들이 없었다면 그는 구석에 놓인 의자까지 갈 기력도 없이 링 한가운데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세 정류장쯤 지났을 때 그는 아까부터 그를 쏘아보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주머니는 아셨을까? 몸살 기운이 온몸에 퍼졌어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를.
그나 아주머니나 1분간의 휴식도 없이, 구석의 의자도 없이 내리 경기를 치른 권투 선수같다는 공감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주머니는 그보다 한 라운드 더 뛴 선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글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김미라, 쌤앤파커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