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어린 스승을 모신다는 것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어릴 적에는 태산처럼 높고 철벽처럼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어느새 말랑말랑한 찰흙처럼 부드러워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절대로 여자 혼자 여행을 보내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던 어머니가 얼마 전에는 친구에게 딸을 혼자 여행 보내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여행을 다니면서 성격이 많이 밝아졌어. 혼자 여행 다니면서 씩씩해지고, 경험도 풍부해지고, 글도 더 많이 쓰고, 그 집 딸도 한번 멀리 여행을 보내봐.”
저분이 정말 매일 딸들의 통금시간을 철저히 체크하던 우리 어머니가 맞나 싶었다. 철옹성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던 어머니의 마음이 세월이 지나면서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진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해서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버지. 그러던 아버지가 이제 “여자 못할 게 무엇이 있냐”고 말하면, 나는 놀라움과 함께 뿌듯함을 느낀다.
사실 영혼의 젊음을 유지하는 게 몸의 젊음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젊어지기 위한 비결은 바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달려 있다. 상처가 생겼을 때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야말로 젊음의 지름길인 셈이다.
마음의 회복탄력성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온갖 다채로운 상황과 가능성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왜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지?’, ‘왜 저 사람은 내 뜻을 따라주지 않지?’ 이런 자기중심적인 기대로부터 마음의 고삐를 풀어주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이 풀리지 않네, 하지만 그것도 생각보단 괜찮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유연성이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이건 꼭 이렇게 되어야만 해!’라고 믿는 연혼의 경직성이야말로 노화의 지름길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늙지 않으려는 마음의 집착’이며, 세상의 흐름을 결코 따라갈 수 없으리라 자격지심이다. 나이 들수록 지혜로워지고 더욱 여유로워지며, 천지난만해지는 오인들의 특징은 바로 ‘평생 무언가를 배우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나보다 어린 스승’을 모심으로써 나이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사자성어에는 어린 사람을 향한 존중과 배려가 담겨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후학을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어린 사람을 향한 두려움이 ‘공포’가 아니라 ‘경외감’이라고 생각한다. 윗사람을 향한 강요된 존경만을 강조하는 한국 문화에서 꼭 필요한, 더욱 어른다운 마음가짐이다.
어린 사람을 훈계하려고만 하지도 말고, 나보다 뛰어날까 봐 미리부터 찍어 누르지도 말고, 그의 재능과 진심이 세상 속으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할 일이 아닐까. 어린 사람들 속에서 놀라운 점, 배울 점, 아름다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즐거움이다.
어린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윗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때의 압박감이 없을 뿐 아니라 ‘친구 같은 스승’을 만드는 최고의 방안이기도 하다. 중국의 철학자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갑을관계의 대립이 날로 심각해지고, 윗사람을 향해 충언은커녕 사소한 불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사회에서 이런 스승 같은 친구, 친구 같은 스승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장자와 소통하는 것’에서 어쩔 수 없는 권력관계를 발견하고 실망했다. 대신 나보다 어린 사람을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갑을관계로 찌든 스승과 제자의 파워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출구를 찾았다.
나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선생님으로부터 첼로를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딱 두 시간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온갖 걱정의 실타래로부터 잠시나마 놓여날 수 있다. 나는 연주에는 젬병이지만 ‘첼로를 배우는 행위’로부터는 무한한 영감을 얻는다.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면서 어린 선생님에게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고, “선생님이 직접 연주해주시면 이 곡이 훨씬 잘 이해될 것 같다”는 감언이설로 첼리스트의 아름다운 연주를 집에서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가끔은 악기를 내려놓고 서로의 걱정거리를 나누며 수다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내가 그토록 꿈꿨던 ‘음악가의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이 부러워 ‘그쪽 세계’의 온갖 비화들을 물어보며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취미 하나 없는 건조한 인생이 싫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첼로를 배우는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눈부신 오아시스다. 무엇보다도 첼로 선생님은 기상천외한 칭찬 재조기의 재능을 보여준다. 내 연주가 저번 주나 이번 주나 큰 차이가 없을 때도, “이제 훨씬 활을 편안하게 쓰시네요”, “음정이 훨씬 정확해지셨어요”, “이제 이 곡을 완전히 이해하신 것 같아요”라는 식의 칭찬을 늘어놓는다.
스승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보다는 질책과 비난을 훨씬 많이 들었던 나로서는,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칭찬을 듣는 제자의 마음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스승이 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나 또한 이 배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나의 첼로 선생님이 얼마 전 손가락을 다쳤다. 그녀의 남편과 시댁 어른들이 ‘네 연주를 듣고 싶다’고 여러 번 청을 넣자 선생님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남편에게도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첼로 연주를 나에게 그토록 아낌없이 들려주었다는 사실ㄹ을 알게 되자 더욱 마음이 애틋해졌다. 그 귀여운 수줍음과 강렬한 자의식이 더욱 아프게 마음을 울렸다.
거실에 울려 퍼지는 선생님의 첼로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차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선생님에게 고백하고 싶어진다. 수없이 첼로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보다 어린 선생님이 나룰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을 알기에, 첼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스승은 항상 두려운 조재, 날 아프게 하는 존재였지만 당신으로 인해 처음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스승을 발견했다고.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中에서……
저분이 정말 매일 딸들의 통금시간을 철저히 체크하던 우리 어머니가 맞나 싶었다. 철옹성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던 어머니의 마음이 세월이 지나면서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진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해서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버지. 그러던 아버지가 이제 “여자 못할 게 무엇이 있냐”고 말하면, 나는 놀라움과 함께 뿌듯함을 느낀다.
사실 영혼의 젊음을 유지하는 게 몸의 젊음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젊어지기 위한 비결은 바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달려 있다. 상처가 생겼을 때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야말로 젊음의 지름길인 셈이다.
마음의 회복탄력성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온갖 다채로운 상황과 가능성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왜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지?’, ‘왜 저 사람은 내 뜻을 따라주지 않지?’ 이런 자기중심적인 기대로부터 마음의 고삐를 풀어주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이 풀리지 않네, 하지만 그것도 생각보단 괜찮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유연성이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이건 꼭 이렇게 되어야만 해!’라고 믿는 연혼의 경직성이야말로 노화의 지름길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늙지 않으려는 마음의 집착’이며, 세상의 흐름을 결코 따라갈 수 없으리라 자격지심이다. 나이 들수록 지혜로워지고 더욱 여유로워지며, 천지난만해지는 오인들의 특징은 바로 ‘평생 무언가를 배우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나보다 어린 스승’을 모심으로써 나이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사자성어에는 어린 사람을 향한 존중과 배려가 담겨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후학을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젊은 후진을 두려워해야 한다. 앞으로 올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린 사람을 향한 두려움이 ‘공포’가 아니라 ‘경외감’이라고 생각한다. 윗사람을 향한 강요된 존경만을 강조하는 한국 문화에서 꼭 필요한, 더욱 어른다운 마음가짐이다.
어린 사람을 훈계하려고만 하지도 말고, 나보다 뛰어날까 봐 미리부터 찍어 누르지도 말고, 그의 재능과 진심이 세상 속으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할 일이 아닐까. 어린 사람들 속에서 놀라운 점, 배울 점, 아름다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즐거움이다.
어린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윗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때의 압박감이 없을 뿐 아니라 ‘친구 같은 스승’을 만드는 최고의 방안이기도 하다. 중국의 철학자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갑을관계의 대립이 날로 심각해지고, 윗사람을 향해 충언은커녕 사소한 불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사회에서 이런 스승 같은 친구, 친구 같은 스승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장자와 소통하는 것’에서 어쩔 수 없는 권력관계를 발견하고 실망했다. 대신 나보다 어린 사람을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갑을관계로 찌든 스승과 제자의 파워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출구를 찾았다.
나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선생님으로부터 첼로를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딱 두 시간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온갖 걱정의 실타래로부터 잠시나마 놓여날 수 있다. 나는 연주에는 젬병이지만 ‘첼로를 배우는 행위’로부터는 무한한 영감을 얻는다.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면서 어린 선생님에게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고, “선생님이 직접 연주해주시면 이 곡이 훨씬 잘 이해될 것 같다”는 감언이설로 첼리스트의 아름다운 연주를 집에서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가끔은 악기를 내려놓고 서로의 걱정거리를 나누며 수다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내가 그토록 꿈꿨던 ‘음악가의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이 부러워 ‘그쪽 세계’의 온갖 비화들을 물어보며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취미 하나 없는 건조한 인생이 싫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첼로를 배우는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눈부신 오아시스다. 무엇보다도 첼로 선생님은 기상천외한 칭찬 재조기의 재능을 보여준다. 내 연주가 저번 주나 이번 주나 큰 차이가 없을 때도, “이제 훨씬 활을 편안하게 쓰시네요”, “음정이 훨씬 정확해지셨어요”, “이제 이 곡을 완전히 이해하신 것 같아요”라는 식의 칭찬을 늘어놓는다.
스승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보다는 질책과 비난을 훨씬 많이 들었던 나로서는,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칭찬을 듣는 제자의 마음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스승이 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나 또한 이 배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나의 첼로 선생님이 얼마 전 손가락을 다쳤다. 그녀의 남편과 시댁 어른들이 ‘네 연주를 듣고 싶다’고 여러 번 청을 넣자 선생님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남편에게도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첼로 연주를 나에게 그토록 아낌없이 들려주었다는 사실ㄹ을 알게 되자 더욱 마음이 애틋해졌다. 그 귀여운 수줍음과 강렬한 자의식이 더욱 아프게 마음을 울렸다.
거실에 울려 퍼지는 선생님의 첼로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차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선생님에게 고백하고 싶어진다. 수없이 첼로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보다 어린 선생님이 나룰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을 알기에, 첼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스승은 항상 두려운 조재, 날 아프게 하는 존재였지만 당신으로 인해 처음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스승을 발견했다고.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