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좋아한다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데, 요즘 까치들은 거짓말만 한다. 연미복처럼 잘 차려입고 있지만 저들은 신사가 아니라 입빠른 촉새 같다. 참새들 먹으라고 내놓은 먹이도 까치들 차지가 될 때가 많다. 고무공처럼 통통 튀어 다니는 귀여운 참새들에 비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까치가 성가시다.
그러나 어떤 새가 먹는다한들 나쁠 게 뭐 있겠는가. 새들은 평등할다. 아니, 생명은 평등하다. 평화란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힘 있는 것이나 힘없는 것이나 공평하게 모여 먹이를 먹는 것이다. 큰 녀석이 좀 더 먹으면 어때. 빼앗아 먹지만 않으면 된다. 까치가 성가시다는 내 생각 또한 편견이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건 편견이다. 편견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내치거나 받아들인다. 반가운 손님이 올 것이라는 오랜 전언(傳.言)은 인간이 만들어낸 헛소리일 뿐 까치가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다.
까치가 울더니 거짓말 잘하던 친구가 다녀갔다. 그는 내게 누구보다도 좋은 벗이다. 젊은 날 그는 자신이 의과 대학을 중태했으며 자신의 백부가 장관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물론 다 거짓말이다. 그 당시 내 주변은 권력가를 가족으로 둔 친구가 있을 만한 토양이 아니었다. 그가 한 거짓말의 압권은 대학보다 출신 고등학교를 속인 것에 있다. 그는 고등학교 또한 명문이던 K고 출신이라 밝혔는데, 실제로 K고를 졸업한 형이 그를 자신의 한 해 선배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말은 진실로 굳어졌다. 그 형도 속은 것이다. 아니, 속은 게 아니라 속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연히 어리석음의 최우선순위는 그 형에게 돌아간다. 어찌 보면 한 해 선배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건만 깍듯이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그 형 탓에 우리 또한 덩달아 그를 두 단계 위의 형으로 대우한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백번 양보해 K고를 졸업했다는 그의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준다 해도 실제로는 그 두 사람이 입학 동기였다는 점이다. 그를 내게 소개한 형이 입학하고 한 해 휴학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간 복학생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입학 동기에 불과한 상대를 형으로 대우했으니 어리석음이 최우선순위를 그 형이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순진도 지나치면 쪼다가 된다. 그러나 학번 없는 세월이 앞뒤 없이 흘러 그때 그를 소개한 그 쪼다 아니 쪼다 형은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물론 의대 출신도 아니고 명문고 출신도 아닌 거짓말 친구는 누구를 가르치는 위치에 서거나 세속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진 못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금 내 마음이 그 진짜 형보다 거짓말쟁이였던 두 단계 위의 가짜 형(지금은 물론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을 더 신뢰하고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은 다르다. 그는 사기꾼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그는 우리에게 선배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좋은 형이었다. 거짓말로 차지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최선을 다했다. 술에 취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집까지 데려다주곤 하던 그는 훌륭한 선배였다. 가방끈 짧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현실을 부풀려 말했을 뿐 피해보다 득을 더 많이 준 사람이 그였다. 옥에 티라면 우리의 단골이던 음악 감상실(그 시절엔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춰놓고 LP 레코드를 들려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주인이 그가 자꾸 몰래 음반을 가져가서는 안 돌려준다며 조심하라고 충고한 것 정도였다.
거짓말이 종착역에 다다른 것은 유학을 간다며 친구들과 함께 송별회까지 한 그가 유학 대신 군 입대를 한 사건 때문이었다. 1970년대 말이니 유학을 가는 것이 영화 속에서나 있을 만큼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그렇게 군대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길에서 군복을 입은 그와 마주친 것이다. 마주치는 순간 그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평소 잘 가던 다방으로 향했다.
휴가를 나왔다가 단골 다방이 그리워 그쪽으로 가던 중 나를 만났던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머잖아 입대하게 될 나를 위해 군대 생활 잘하는 법에 대한 일장 훈시를 했다. 유학 땨윈 벌써 잊어버린 일이었다. 이미 이러쿵저러쿵 그에 대한 소문을 접했던 터라 나 또한 유학은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그가 군복 상의에 달린 명찰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이름과 달랐다. 연예인이 예명을 쑤둣 본명보다 가명이 멋있게 느껴졌던지 그동안 그럴싸한 이름으로 자기를 불렀던 것이다. 나 역시 그가 지어낸 이름이 입에 붙어 지금도 명찰 밖 이름으로 그를 호명한다. 그러니 그것 또한 그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고유명사라고 부르지만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지 원래 고유한 명사가 어디 있겠는가. 개똥이건 쇠똥이건 고유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밖에 없다. 개똥이와 쇠똥이는 그 본질이 입고 있는 옷에 붙여놓은 이름일 뿐인 것이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그는 나보다 한 살 적은 동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살 적은 그를 형이라고 부른 일이 크게 억울하진 않다. 고교 선배라고 우리에게 그를 소개했던 그 쪼다 형은 세 살이나 적은 그를 형으로 대우했으니 내 억울함 쯤이야 명함을 내밀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성장한다. 물론 성장은커녕 퇴보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말하면, '모든 것이 무상하다'가 된다. 무상하다는 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살펴보면 정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니 나 또한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성취를 위해 뛰어드는 것보다 존재에 의미를 둬야 할 시기가 되었다. 끊임없이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마음을 주저앉히며 닥쳐드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시기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뭔가를 이루려 하기보다 광활한 우주 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할 때가 깊어졌다는 말이다.
텅 빈 작업실에 앉아 때로는 온종일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조금 더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여행을 가지 않겠냐는 권유나 어딘가에 투자하라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투자할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버려야 할 시점에 더 기지려 했을 때의 결과를 나는 안다. 100세 시대니 어쩌니 하지만 다 허망한 소리이다. 100세를 살면 뭐 하겠는가. 100세가 되도록 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제 더 욕망으로 일어나는 생각에 끌려갈 시간이 내겐 없다.
오래 넣어온 보험을 해지한다. 넣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돈만 빠져나간 보험이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이상하다. 그러나 아까운 것보다 매달 빠져나가는 돈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았던 스스로가 한심할 뿐, 뭔가에 빠져 있는 사이 인생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몇 푼 안 되는 환급금이 계좌에 입금된다. 보험이 보장하는 미래라는 게 있기나 할까. 미래는 어디에도 없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시간을 사람들은 미래라고 부른다. 보험을 불신하듯 가끔은 남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도 좋다. 남들이 일할 때 직장을 그만두고 남들이 쉴 때 일하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뜻밖으 존재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출판계에 있는 한 젊은 편집자가 말했다. "글과 사람이 같은 존재를 만나기가 힘들어요. 작가라는 앞모습과 너무 다른 뒷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어요. 존경할 사람이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존경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앞과 뒤가 같은 사람과 친구로 살기는 힘들다. 인간은 다 앞과 뒤가 다르다."
환(幻)일지도 모르는 인생에 앞과 뒤가 같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거울없인 아무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앞과 뒤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거짓말이라 막무가내 몰아붙이지는 말자. 인생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엔 거짓말로 인생을 헤쳐 나가는 사람도 있다. 정치가나 예술가가 대표적이다. 정치가는 거짓말로 세상을 파괴하고, 예술가는 거짓말로 세상을 창조한다. 물론 관광객으로 세상을 구경이나 하다 가려는 사람도 많다. 어쩌면 구경이나 하다가 가는 삶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경꾼은 어떤 것도 해치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런 이득도 못 주지만 해를 주는 일도 없다. 거짓말쟁이던 친구 역시 해를 준 일은 없다.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고 그가 공구함을 꺼낸다 못 하나 박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나를 위해 작업실 여기저기를 손봐주러 온 것이다.
글 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