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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진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오작교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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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eongja.jpg

   자두꽃이 만발하고, 명자꽃이 붉은 연서를 내밀고 있다. 너를 사랑하지만 나는 네 연서에 답장을 쓸 연륜이 아니다. 봄은 순정의 빛깔을 내보이지만, 봄에 사랑하는 이는 꽃들의 적이 되니 사랑이란 다 바보 같은 일이다.


   기다리던 인동초의 연둣빛 이파리가 생기를 머금고 있다. 교하의 벚꽃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지만, 그도 나도 다만 고요할 뿐. 한동안 향기로 나를 설레게 할 꽃을 준비하느라 인동초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리지 않는다. 지금 나는 저들의 주인이지만 향기를 터뜨리는 몇 주 동안 저들은 아마 내 주인이 될 것이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가버린 겨울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동해로 간다. 당연히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봄 바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봄이라도 아직은 겨울이 남아 있는 봄 바다를 좋아한다. 겨울의 뒷모습을 따라가기 위한 목표지로 아야진을 정했다. 길고도 긴 터널을 몇 개씩 지나 설악산 바라보이는 속초에 다다른 차가 방향을 조금 더 북 쪽으로 틀어 고성 쪽으로 올라가면 만나는 포구가 아야진이다. 여름이면 해수욕장이 될 이곳의 썰렁한 풍경과 함께 아프다고 소리 내는 듯한 그 이름을 좋아한다. 유난히 포구가 아름다워 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내 “아야, 아야” 소리 내며 아팠던 내 영혼을 달래기 위해 찾아가는 행로이다.

   아야진.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여전히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초로의 벗을 앞에 둔 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때로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성도 동성과 같이 벗이 되는 일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간절하게 매달려야 할 어떤 것도 없어지는 일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스스로 만들었던 벽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소유의 관계가 존재의 관계로 바뀌는 일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비로소 아야진 바다를 보며 제주 바다를 생각하는 일이다.

 

아야진해수욕장(2020.07.04)01.jpg

 아야진 해수욕장

 


   제주 바다를 떠올리면 파도가 부서지는 월정리 지나 세화가 생각난다. 애월에서 표선까지 바다는 멀어도 에메랄드빛으로 아름다웠고, 그날 밤늦도록 우리는 카페에 있었다. 멀리, 존재하지도 않는 연인에게 편지를 보내듯 그와 나는 인생의 꿈과 예술의 꿈을 이야기했고, 마침내 모든 꿈은 개꿈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모든 꿈은 개꿈이다.

 

   심야 1시, 손님 없는 겨울 해변엔 그 시각까지 문을 여는 가게가 없다. 톱밥 난로가 타던 강원도의 겨울 찻집을 생각하며 바람 드센 자동차를 달리는 우리는 그저 무명의 가객(歌客, 그가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이고 나는 시를 노래라 주장하는 시인이니)일 뿐 찾아보면 어디에도 우리를 알아보는 이는 없다.

   파도가 소리를 내고, 침묵이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섬의 창문은 있는 힘을 다해 창문을 구타하고, 동백 떨어지는 소리가 환청인 양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머리카락 사납게 헝클어놓는 길을 밟고 우리는 밤의 해변을 거슬러 그렇게 돌아간다. 숨어 잇던 펜션의 불빛이 담요 속에 넣어둔 손처럼 따뜻하다. 각자의 침대로 헤어져 자리에 눕자 문자가 날아왔다.

 

   “왜 하모니카를 안 불어요?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 건가?” 물음표 2개가 찍혀 있는 문자를 보는 순간 일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카페에 하모니카를 두고 온 것이다. 창문을 구타하던 바람이 바르르 구타하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파도가 하얗게 비명을 지른다. 파도의 비명을 귓전으로 흘리며 두고 온 연인을 찾아가듯 나는 자동차를 몰았다.

   하모니카를 잃어버리듯 때로는 까맣게 잊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있다. 속초에서 아야진까지 가는 동안 불심 검문하듯 걸려온 전화 한 통, 문자 한번 없던 이에게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는 이제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난 그가 외롭다는 신호이다. 외로워서 느닷없이 잊었던 이가 떠오르고, 외로워서 옛 친구의 안부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 사람의 슬픔과 그 사람의 아픔과 그 사람의 고독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잘나가는 것은 한때지만 영원하지 않다. 못 나가는 것 또한 한때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다. 다음 생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생의 아픔과 이생의 고난은 다음 생의 거름이 되어 꽃으로 필 것이다. 타인에게 베푼 선행이 뒷날 내게 선물로 돌아오듯 그렇게 되어 있다. 인생은 뜻밖의 반전이 인생에 숨어 있듯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이 느닷없이 안부를 물으며 그때는 내가 잘못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전화를 걸어올 때가 있는 것이다.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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