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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존중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오작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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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과 낮은 자존감은 다르다. 참된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나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결코 자존감 낮은 사람이 아니며, 자존감 높은 사람의 겸손이 진짜 겸손이다. 반면 자존감 낮은 사람의 겸손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함이나 자학인 경우가 많다. 괜찮은 외모와 괜찮은 학벌과 괜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못났다고 여기는 사람은 왜 그런 것일까?

   겉으로는 어디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내면의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그 낮은 자존감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는다. 잘 나서지 않고 움츠리듯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그들을 사람들은 겸손하다고 평한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타인의 것일 뿐 그들은 그런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스스로 자신을 못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 별로 내세울 것 없는데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 자존심이 강한 유형이거나 아니면 잘난 척하는 유형이다. 이런 사람들의 내면 또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를 때가 많다. 실제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삶과 조화를 이루어 주변 사람들과 쉽게 동화되지만, 잘난 척하는 유형은 그러지 않는다. 잘난 척하는 이는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내면이 열등감으로 꼬여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그 열등의식을 만회하기 위해 그들은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하는 것일 뿐 결코 자존감이 높은 것은 아니다.

   똑똑한 여성이 있었다. 철밥통이라 여기는 직장의 중간 간부인 그녀는 겉으로 보기만 해도 똑 부러지게 일 처리를 할 것 같은 스타일이었다. 행사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빛났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일 처리를 하는 노련한 솜씨는 눈길을 끌 만했다. 이후 몇 번 더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다.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겉으론 잘 들어주고 수긍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자기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한테만 해당할 뿐 경쟁심을 느낄 만한 위치의 사람들에겐 냉정했다. 타인을 배려하고 잘 도와주는 듯 보였지만, 도움의 대상이 제한적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 가까워지면서 여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왜 내게 그런 고백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이 들어 만난 남자 친구에게 맞고 산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골드미스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왜 당장 헤어지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린다는 말에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이렇게 똑똑한 여자가 남자에게 맞고 살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스스로 법 감각이 뛰어나다고 말한 이가 그녀였다. 화난 듯 내뱉은 내 말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 남자를 사랑해서 그런가요?” 다시 내가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똑똑한 모습은 간곳없었다. “폭력은 절대 사랑이 아니에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해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화를 접어야 했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마치 심문하고 자백하는 취조 행위 같아 주제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 그녀는 더 이상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상담 방법에 대해 공부한 적 없는 내가 상담이 필요한 그녀에게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하는 뉘우침이 왔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그때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그러나 내 몫의 질문이 못 되었다. 오래가지 않아 그녀를 잊어버린 것이다. 자존감 이야기를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다.

   잘난 척, 예쁜 척, 있는 척하는 우리의 행위는 뭔가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에고(ego)가 취하는 자기방어 같은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우리는 내면의 꼬여 있는 진실을 숨기려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는 사람이 바로 ‘척하는’ 유형이다. 모쪼록 그런 유형을 만나면 무조건 비난하진 말자. 우리도 그런 사람일 때가 많으니까. 잘난 척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결코 잘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느리게 가는 달팽이를 바라보듯 ‘저 사람의 에고는 진화 속도가 몹시 느리구나’하며 가볍게 알아차리고 넘어가면 될 뿐이다.

   내면이 꼬인 사람은 타인의 지적에 공격적 반응을 보이기 쉽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존감 또한 낮다. 아마도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좌절의 경험을 딛고 일어서지 못한 아픔의 흔적이 그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혔으리라. 낮은 자존감은 상처를 받기 쉬우니 예사로 건넨 이야기를 턱없이 확대해서 받아들이거나, 100g밖에 안 되는 이름의 무게를 1t 무게로 높여 자신을 괴롭힌다.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거나 학대하는 낮은 자존감의 원인은 아마 자신이 자기를 믿지 않은 셀프 불신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나는 왜 나를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도 한 원인이며, 자신의 삶이 비도덕적이라고 믿는 생각 또한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이 스스로 정해놓은 삶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자각이 셀프 불신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평가나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격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부족 또는 미흡 같은 부정적 단어로 규정하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불신을 거두어야 한다. 스스로를 신뢰하라는 말이다. 자신을 신뢰하라는 말을 자뻑이나 오만 같은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때로 자뻑은 삶의 활력을 위해 필요하기도 하지만, 정도를 넘은 자뻑이나 오만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찾아보면 그것의 밑바닥에도 역시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자기 비하가 숨어 있을 것이다. 자신을 신뢰하기 위해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비난을 삼가고, 내가 한 말과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책임을 지는 길 또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용기에서부터 시작되니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이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실책과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떠넘기거나, 그러기 위해 누군가 희생양을 찾아 두리번거리거나, 억울한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그 또한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 중 하나이다. 스스로의 불신을 타인에게 투사해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그들이 지닌 에고의 전략이다. 그러나 낮은 자존감을 부여잡고 있는 이상 우리는 그 낮은 세계의 현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욕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난과 욕설이 자아내는 낮은 차원의 현실을 스스로 끌어당기는 셈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욕설과 비난 대신 덕담과 칭찬하기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높은 차원의 현실 속으로 자신의 의식을 상승시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믿는 딱 그만큼의 세상과 만난다. 어떤 풍요로운 현실 속에 놓여 있다. 해도 당신의 마음이 불만에 사로잡혀 행복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현실은 결핍된 상황으로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무엇인가를 불신하는 한 우리는 결코 조화로운 세상과 만날 수 없다. 나 스스로를 불신하는데 어찌 내가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제대로 된 겸손을 배우기 위해선 먼저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커져야 한다.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커지기 위해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한다. 타인과 나는 분리된 것 같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려면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세상과 나와의 관계를 조화롭게 맺는다는 말이다. 그런 조화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 앞에 정직해지는 일이다. 정직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이니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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