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샘터

메마른 삶에 한 주걱 맑은 물이 되기를
  • Go Back
  • Down
  • Up
  • List
  • Comment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마음이 있듯이 / 저녁에 당신에게

오작교 23110

0

0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여자 사람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모처럼 현실을 떠나 맑은 마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학창시절부터 만나던 대부분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지만, 오늘 만난 그녀와는 해마다 한두 번은 만나왔습니다.

   결코 서로의 이상형은 아니어서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 오히려 좋았죠. 세상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고, 동성의 친구들과는 나눌 수 없는 섬세한 감성도 이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읽은 책 이야기와 영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삶도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고, 자극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만난 그녀는 더 특별했습니다. 무언가 전보다 근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아주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짐의 대부분을 정리하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삶이 홀가분해졌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작별하면서 인생에 새로 눈 뜬 것 같다고, 이렇게 가벼울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무겁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책도 스무 권 정도만 남겨놓았고, 옷도 절반 이상 버렸고, 더 이상 소비에 현호고디지 않으니까 삶이 더 윤택하고 풍서어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녀에게 남겨진 스무 권의 책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 하자 스무 권 중의 네 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삶을 정리한 사람이라면 무언가 단호한 표정은 가질 만도 한데, 그녀는 더 맑고, 더 고요하고, 더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부러움을 담아 “미니멀 라이프의 정점을 경험하고 있네” 하고 그녀의 변화를 축하해주었습니다.

   너무 맑아지면 차가워지기 쉽고 너무 간결하면 정 없기가 쉬운데, 그녀는 맑으면서도 따뜻했고 간결하면서도 너그러웠습니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그는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중앙우체국으로 갔습니다. 그녀에게 선물해주려고 샀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많은 걸 버였다는 그녀 앞에 내놓기가 어색해서 끝내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녀를 보내고 생각해보니 정갈하게 비워진 작은 공간을 음악으로 채우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엽서 한 장을 사서 이렇게 썼습니다.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정갈한 너의 공간에 버릴 수 없는 음악이 붕붕 떠다니길 바라.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은 것과 더불어 행복해지길 바라.


글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
ShareScrap
0
Add Comment
Cancel Add Comment

Report

"님의 댓글"

Report This Comment?

Comment Delete

"님의 댓글"

Are you sure you want to delete?

List

Share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Date (최신순)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374
normal
오작교 22.12.01.12:32 23117
373
normal
오작교 22.12.01.12:06 20489
372
normal
오작교 22.11.28.15:37 22344
371
file
오작교 22.11.28.15:30 19661
370
normal
오작교 22.11.18.21:03 20072
369
normal
오작교 22.11.18.20:52 20355
368
normal
오작교 22.10.24.13:59 20852
367
normal
오작교 22.10.18.15:07 19279
normal
오작교 22.10.18.14:45 23110
365
normal
오작교 22.10.05.14:35 25497
364
normal
오작교 22.10.05.14:13 22079
363
normal
오작교 22.09.27.15:56 17620
362
normal
오작교 22.09.22.20:17 17107
361
normal
오작교 22.09.14.09:10 18393
360
normal
오작교 22.09.14.08:56 21812
359
normal
오작교 22.08.05.16:52 20243
358
file
오작교 22.08.02.13:10 19401
357
file
오작교 22.07.26.08:59 19539
356
normal
오작교 22.07.11.15:11 17856
355
normal
오작교 22.07.09.13:37 21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