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질병, 선택중독증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 말
어린 시절에는 ‘선택을 잘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객관식 문항의 정답을 고르듯이, 인생에는 ‘정답’까지는 아닐지라도 ‘가장 나은 해답’은 있을 거라 믿었다. 그 가장 좋은 해답을 찾는 것은 ‘나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절반만 맞다.
개인적인 선택에서는 그 말이 맞을 수 있지만 사회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나만의 선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최소 5년 동안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가. 군대에 가고 싶지 않지만 ‘국방의 의무’를 짊어져야만 하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지 않는가.
사실 개인의 선택에도 ‘고를 수 있는 것’보다는 ‘고를 수 없는 것’이 더욱 결정적일 때가 있다. 우리는 가족이나 국적을 고를 수 없고, 성별과 생김새와 이름마저 고를 수 없다. ‘결정할 수 있는 것들’보다는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된다.
우리가 사소한 선택을 제멋대로 자유롭게 하는 순간에도 많은 것들이 결정되고 있다.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옷을 살 때, 그 옷들은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극단적인 저임금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일 때가 많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동네 상권이 죽어갈 수도 있다.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믿었으나 알고 보니 사회적인 선택인 경우도 많은 것이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5분 이상 고민한 적이 있는가. 무심코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가 영 마음에 드는 채널이 없어서 차라리 텔레비전을 꺼버린 적이 있는가. 필요한 물건을 인터넷을 통해 구매하려 했다가 유사한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구매를 포기한 적이 있는가. 내가 산 옷이 다른 매장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면 당신은 선택중독증이라는 병 아닌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불치병은 아니지만, 난치병임에는 분명한 이 선택중독증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감염될 수 있는 마음의 질병이다.
선택중독의 뿌리에는 강력한 환상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선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망상, 철저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그에 따른 만족스러운 결과가 보상으로 따라줄 것이라는 계산이다.
하지만 소비를 통해 인생 자체를 바꾸기는 어렵다. 그때 그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을 텐데! 라는 식의 낭만적 환상도 부질없다. 아무리 멋진 사람을 선택해도 이 세상 모든 불행의 ‘경우의 수’를 비껴갈 수는 없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들의 기계적인 모자이크라기보다는 예측 불능의 변수들과 통제 불능의 욕망, 그럼에도 그 모든 우연을 뛰어넘는 의지와 노력의 화학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미지의 화합물에 가깝다. 인간은 A와 B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한 결과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
이 끝없는 선택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완전한 해결책은 없지만 나 역시 지극히 귀가 얇아 오랫동안 선택중독증을 앓아온 사람이기에 소박한 노하우를 지니게 됐다.
첫 번째,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런 피곤한 환상과 ‘인생 한 방’이라는 식의 한탕주의가 결합하면, 그 끝에는 ‘선택의 도미노적 타락’이 기다리고 있다. 소비나 투자를 향한 선택에 자기 인생이라는 소중한 담보물을 내걸고 끝없는 도박을 벌이며, 지칠 줄도 모르고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유명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답습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고, 나에게 어울리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치관을 정립해나가야 한다. 예컨대 ‘성공하는 사람들의 100가지 습관’보다는 타인의 신뢰를 한 번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신뢰감을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이다. 이런 삶은 우리를 선택중독으로 인한 만성 두통에 시달리게 하지 않는다. 내 삶의 결정권을 ‘나’ 아니 다른 무엇에서도 찾지 않아야 진짜 해방이 시작된다.
세 번째, ‘나’라는 존재를 투자의 대상이나 수확의 대상으로 상품화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하라는 식의 상술에 ‘나’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N포 세대’나 ‘흙수저’ 같은 자조적인 명명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함부로 우리 삶을 그런 식으로 명명할 수 없도록 단단히 마음의 무장을 해야 한다. 무언가가 있어야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괜찮은 나를 단련해나가야 한다.
재산이나 권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형태야말로 빈약하고 척박한 자아의 증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타인에게 잘 보일 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준엄한 눈초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떤 옷을 살 것인가보다는 오늘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어떤 자동차나 주택을 구매할 것인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보자. 상품의 소비로 마음의 허기를 채울 게 아니라 경험과 인연의 확장으로 영혼의 결핍을 채워야 한다.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개인적인 선택에서는 그 말이 맞을 수 있지만 사회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나만의 선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최소 5년 동안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가. 군대에 가고 싶지 않지만 ‘국방의 의무’를 짊어져야만 하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지 않는가.
사실 개인의 선택에도 ‘고를 수 있는 것’보다는 ‘고를 수 없는 것’이 더욱 결정적일 때가 있다. 우리는 가족이나 국적을 고를 수 없고, 성별과 생김새와 이름마저 고를 수 없다. ‘결정할 수 있는 것들’보다는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된다.
우리가 사소한 선택을 제멋대로 자유롭게 하는 순간에도 많은 것들이 결정되고 있다.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옷을 살 때, 그 옷들은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극단적인 저임금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일 때가 많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동네 상권이 죽어갈 수도 있다.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믿었으나 알고 보니 사회적인 선택인 경우도 많은 것이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5분 이상 고민한 적이 있는가. 무심코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가 영 마음에 드는 채널이 없어서 차라리 텔레비전을 꺼버린 적이 있는가. 필요한 물건을 인터넷을 통해 구매하려 했다가 유사한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구매를 포기한 적이 있는가. 내가 산 옷이 다른 매장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면 당신은 선택중독증이라는 병 아닌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불치병은 아니지만, 난치병임에는 분명한 이 선택중독증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감염될 수 있는 마음의 질병이다.
선택중독의 뿌리에는 강력한 환상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선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망상, 철저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그에 따른 만족스러운 결과가 보상으로 따라줄 것이라는 계산이다.
하지만 소비를 통해 인생 자체를 바꾸기는 어렵다. 그때 그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을 텐데! 라는 식의 낭만적 환상도 부질없다. 아무리 멋진 사람을 선택해도 이 세상 모든 불행의 ‘경우의 수’를 비껴갈 수는 없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들의 기계적인 모자이크라기보다는 예측 불능의 변수들과 통제 불능의 욕망, 그럼에도 그 모든 우연을 뛰어넘는 의지와 노력의 화학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미지의 화합물에 가깝다. 인간은 A와 B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한 결과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
이 끝없는 선택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완전한 해결책은 없지만 나 역시 지극히 귀가 얇아 오랫동안 선택중독증을 앓아온 사람이기에 소박한 노하우를 지니게 됐다.
첫 번째,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런 피곤한 환상과 ‘인생 한 방’이라는 식의 한탕주의가 결합하면, 그 끝에는 ‘선택의 도미노적 타락’이 기다리고 있다. 소비나 투자를 향한 선택에 자기 인생이라는 소중한 담보물을 내걸고 끝없는 도박을 벌이며, 지칠 줄도 모르고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유명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답습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고, 나에게 어울리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치관을 정립해나가야 한다. 예컨대 ‘성공하는 사람들의 100가지 습관’보다는 타인의 신뢰를 한 번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신뢰감을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이다. 이런 삶은 우리를 선택중독으로 인한 만성 두통에 시달리게 하지 않는다. 내 삶의 결정권을 ‘나’ 아니 다른 무엇에서도 찾지 않아야 진짜 해방이 시작된다.
세 번째, ‘나’라는 존재를 투자의 대상이나 수확의 대상으로 상품화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하라는 식의 상술에 ‘나’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N포 세대’나 ‘흙수저’ 같은 자조적인 명명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함부로 우리 삶을 그런 식으로 명명할 수 없도록 단단히 마음의 무장을 해야 한다. 무언가가 있어야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괜찮은 나를 단련해나가야 한다.
재산이나 권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형태야말로 빈약하고 척박한 자아의 증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타인에게 잘 보일 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준엄한 눈초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떤 옷을 살 것인가보다는 오늘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어떤 자동차나 주택을 구매할 것인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보자. 상품의 소비로 마음의 허기를 채울 게 아니라 경험과 인연의 확장으로 영혼의 결핍을 채워야 한다.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