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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와 꿈 / 아버지의 뒷모습

오작교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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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로 받은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나서 여행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책은 손위 누이가 소포로 보내온 책이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은 여행기를 통하여 접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은 여행의 꿈을 키워준 책이었다. 태평양에서 표류하였던 <희망호의 모험>은 용기를 길러준 좋은 책으로 기억한다.

   1970년대 김찬삼과 김형욱, 최근 인기 여행가 한비아, 유홍준 교수의 여행기를 보면서 미지의 세계를 알게 된 책이다. 《허클베리 핀》, 《보물섬》, 콜럼버스에서 피어리까지 탐험 서적이요, 여행의 갈증을 해소해 준 도서였다. 탐험기와 여행기는 촌동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었다. 책 속 주인공처럼 새로운 나라의 문물, 신기한 풍습에 가슴이 벅차올라 책을 안고 잠을 청한 때가 자주 있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는 만화가 아닌 여행의 길잡이 책이 아니던가.

   내가 보는 세계의 3대 여행가는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 사틀르 달레 세 분과 한반도에 태어난 3대 여행가로 혜초와 최부, 박지원을 꼽는다. 가장 강렬했던 영감을 준 여행기는 530여 년 전 금남 최부가 쓴 《표해록(漂海錄)》이다. 표해록은 말 그대로 바다에 표류한 기록이다. 금남 최부(1454~1504)는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출생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34세 때인 1487년 9월 제주도 3읍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다. 추쇄경차관이란 도피 중인 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조정에서 직접 파견하는 중앙관직이며, 그는 1488년 정원 그믐날 고향 집의 하인이 상복(喪服)을 가지고 와서 부친의 부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일단 배로 전라도 해남을 향하였고 그곳에서 고향 나주가 목적지였다. 그에게 딸린 일행은 7명과 제주 목사가 허락한 선원 35명을 포함한 43명이었다. 악천후 속에 출항한 배는 폭풍우를 만나 표류가 되면서 자신의 일로 인하여, 고난에 처한 사실을 사과하였다. “배 안에서는 생사고락을 같이해야 한다. 살면 함께 살고, 죽더라도 함께 죽자.”라는 심정이 드러난 여행기였다. 해남이 아닌 중국 절강성 태주부 해안으로 표류 13일 만에 상륙하였다.

   겨울에 떠나간 그는 여름인 1488년 6월 14일 한양에 도착까지 148일 동안 3,400킬로미터, 8,800리의 소회가 담긴 여행기다. 조난당한 백성을 구한 지도자로 맹골수로 해역에서 304명을 수장시킨 선장과 비교된다. 세월호 침목 7시간 동안 국민 모두는 영상을 통하여 죽어가던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고 《표해록》 저자인 최부의 묘소를 찾아가기로 작정하였다. 전남 무안군 몽탄면 호반로 마을회관 앞 남향 산 중턱의 묘지였다. 마을 이장이라는 여성분을 만났다. 최부의 후손 한 분이 인근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에 생존한다고 하여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배산임수 유택 앞으로 말없이 흐르던 영산강지류만 보았다. 유택 좌우로 28세대, 57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무덤 앞 정자에서 노인들이 건네준 수박 한 조각이 남도의 소박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표해록》의 역사적 가치를 현지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달레 신부가 쓴 조선여행기 또한 《표해록》을 보고 쓴 여행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표해록》은 동아시아 3국의 중세역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500년 전 역사에서도 일본의 해적 근성을 확인시켜준 책이기도 하다. 《표해록》을 읽고 나서 《동방견문록》이 쓰인 200년 쥐에 중국대륙을 횡단한 조상이 걸었던 길을 답사해 보겠다는 다짐도 했다. 제주 해안-영파(절강성)까지의 해로, 육로로는 항주-서주-천진-북경-풍운-요동-의주-한양-전주까지 돌아오는 행로가 나의 버킷리스트이다.

   역사는 돌고 돌아서도 과거의 국민성은 남아 있나 보다. 해적으로 날뛰던 일본과 조선, 명나라의 역학관계는 사드 사태와 닮았다. 오백여 년 전 항왜원조(降倭援朝)는 항공원한(抗共援韓)으로 명나라 자리에 미국이 들어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에는 세월호 인양을 바라는 노란 깃발들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죽음은 무엇 때문이라는 말인가? 바로 인재이자, 사령탑의 무능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눈앞에 둔 난파선에서 한 사람도 낙오시키지 않고 살아남도록 의연하게 대처했던 최부 같은 공무원이 필요하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한반도의 운명이 위태롭다. 국록을 먹는 지도자들 모두 책임회피에 급급한 현상이다. 이럴 때 530여 년 전 조선의 공직자가 보여준 위기 상황의 대처 능력이 자꾸만 비교된다. 내 인생 마지막 버킷리스트가 현실이 되던 날 다시 금남의 묘를 찾아 아뢰고 싶다.

글출처 : 아버지의 뒷모습(이준구 수필집, 수필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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