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 그 생의 변두리에서
유년기를 보낸 동네는 버스의 종점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위치상으로는 서울 시내의 중심에 속하는 곳이었지만 나는 늘 변두에서 자랐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종점은 끝나느 곳이 아니라 무언가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웠던 것 같습니다.
버스 종점에서는 승객들이 올라타도 버스가 곧바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채워지거나 배차 시간이 되어야 떠나곤 했지요.
사람들의 삶에 어느 만큼의 슬픔과 눈물이 채워져야 그 다음 페이지가 펼쳐지던 것처럼......
종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신산하거나, 건강한 의욕으로 넘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처에 있던 '예쁘다 미장원'도 생각납니다.
찰캉거리는 고데 기구로 여인들의 머리를 부풀리며 노래를 부르던 예쁘다 미장원의 주인아주머니.
그녀의 눈은 자주 멍이 들어 있곤 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예쁘다 미장원의 삐걱거리는 2층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어린 내게 이상하게도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 종점에서 함께 버스를 타던 많은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자주 들려오던 골목길, 그러나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고,
살림은 남루해도 마음은 다정하던 이웃들이 훨씬 많았던 그 곳.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누구네 집 식구인지 가늠할 수 있었던 좁은 골목과
아버지가 부르시던 '매기의 추억'이 초인종을 대신하던 그곳.
글 출처 : 위로(김미라 : 샘터)中에서......
배경음악 : 매기의 추억 / 박인수
제게도 그러한 주억들이 가슴에 묻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살았던(물론 지금도 그대로 있지만) 집은 긴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 곳이 었습니다. 남원 사투리로는 '곰삭'이라고 부르던 긴 골목길이지요.
어렵고 팍팍한 삶을 살던 이웃들이었지만,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했던 이웃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이만큼 자랄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진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고향입니다.
지금은 마포대교가 여의도로 뚫리고
대로변 양옆은 삘딩숲으로 뒤덮히고
거북등 같이 따닥 따닥 엉켜 기어가던
산등성이 판자집들이 초고층 아파트군
으로 변해버린 전차의 종착역 마포종점,
어릴적 살던 도화동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 갑니다.
마포 나룻터 뚝방에서 바라보던 영등포와
여의도의 모습, 당인리 화력 발전소에서
뿜어나오던 연기, 유난히 많았던 제재소
이런 모습이 바로 50 여년전의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 였습니다.
고향 하면 항상그리운곳 이지요
저는 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집이
띠엄 띠엄 있서 골목길은 없섰고
뻐스종점은 500미터쯤 가야있섰지요
어릴적 소꼽친구들은 거개가 고향을
떠나 인천에 살고 있지요
그래서 분기에 한번씩 남자 여자 친구들은
지금도 모임을 하고 있답니다
저는 부산토성동 경남중학교 (지금토성중학교)
근처에서 살았죠 . 학교안에 은행나무가 담을두고
인도에 가지가 뻗어 여름엔 좋은 그늘이되어 동내
사람들이 쉬고,애들의 놀이터이기도 했죠 .
내친구 복순이,금선이,영희 ...어디서 살고있는지
소식도 모르겠고 우리집뒤 골목집에 살던 선아는
술주정뱅이아버지탓으로 밖으로 내~나다니 더니
결국 소년원에서 죽었고 ...선아언니가 독일간호원
으로 가더니 자리를 잡자 선아엄마,그리고 형제를
모두데리고 캐나다로 갔는데 소식도없고 ..그래도
기독사회관우리친구4명은 2달만에 한번씩 만나우정
을 나누고있답니다 .
달동네하면 떠오른곳이
바로 서울의 관악구 봉천동인것 같군요...
제가 알기로는 관악구는 봉천동과 신림동 그리고 남현동
이렇게 딱 3개의 동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던것 같은데,
지금은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섰겠지만
제 기억으론 아직도 봉천동과 난곡동 하면 달동네라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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