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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장 편지와 주머니 공돈

오작교 5772

1
나의 집이란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에 맞게 옷을 꺼내 다려서 옷장에 걸고, 철 지난 옷을 빨아서 잘 개켜 서랍에 차곡차곡 정돈하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큰맘 먹고 날 잡아 정리하고 나면 그야말로 거의 초주검의 지경에 이를 만큼 피곤하다. 때론 게으름 때문에 철 지난 옷과 새 철 옷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하긴 꼭 게으름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조금 어긋나는 말이기도 하겠다. 어떤 날 하루를 정해서 이 계절에서 저 계절로 금을 긋듯 넘어가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고 있는 시기에는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대개 남자들이 옷에 더 둔감하다. 학생 시절 교복도 여학생에겐 춘추복이란 게 있었지만, 남학생에겐 종복과 하복 둘뿐이었다. 그래서 어제까지만 해도 반팔 교복 입었다가 10월 2일만 되면(10월 1일 ‘국군의 날은 공휴일이었던 이야기다) 갑자기 온 시내가 까만 교복으로 표변하곤 했다. 그러면 덩달아 직장인들도 얼떨결에 동복을 꺼내 입기도 했다. 아마도 며칠 잠깐 한국에 들렀던 외국인들이라면 나라에 무슨 국상(國喪)이라도 난 줄 알았을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모두 까만 상복을 입고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남자들은 계절과 날씨보다는 날짜에 맞춰 새 옷을 꺼내 입는 묘한 유전자가 남은 모양이다.

   월요일 아침, 모처럼 일요일 산행을 마치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마신 술 탓에 늦잠을 잔 그가 아침은 건너뛰기로 하고 부랴부랴 옷을 꺼내 일은 게 하필 새로 걸어놓은 옷이었다. 그러나 그걸 확인할 만큼의 여유로운 정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들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정류장에 회사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막 도착하는 걸 보고, 한걸음에 우사인 볼트를 앞지를 속도로 달려가 간신히 올라탔다. 그런데 아뿔싸! 지갑을 다른 웃옷에 둔 걸 깜빡했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며,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 그는 모든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보았다.

   평소에 입던 거라면 모를까 지난 계절 장롱 구석에 박혀 있다가 며칠 전 새롭게 덜린 옷이었으니, 천 원짜리 한두 장도 없을 건 뻔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웃옷 오른쪽 주머니에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꺼내보니 만 원짜리 두 장과 천 원짜리 석 장이었다. ‘세상에! 살다 보니 이렇게 기적 같은 일도 있네!’ 하며 순간 얼마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가끔은 이렇게 어쩌다 새 계절을 맞아 꺼내 입은 새 옷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지폐 몇 장을 발견하고 마치 공돈이 생긴 양 흐뭇할 때가 있다. 분명 제 돈인데도 길에서 주운 것처럼 말이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역시 나는 운이 좋아. 게다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예비비까지 마련하는 이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이란!’

   그는 뜻하지 않게 미리 준비해둔 듯 모처럼 꺼내 입은 옷에 돈이 있었으니, 새로운 한 주는 분명 행운이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가 만발했다.

   “난 계절이 바뀔 때면 약간의 돈을 모처럼 꺼낸 남편 옷 주머니에 넣어둬. 그런 경우 있잖아. 뜻하지 않게 옛날 옷 주머니에 돈이 있을 때의 즐거움. 그 작은 돈으로 ㅣ하루가 유쾌해질 수 있잖아. 아마 그걸로 적어도 그날 하루만이라도 호사롭게 점심 메뉴가 바뀌는 은밀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오랜만에 연락해온 친구와 가까운 카페에서 수다를 떨던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산타클로스의 미소처럼 활짝 웃음이 묻어났다.

   “좋은 아이디어네. 어쩜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니?”

   친구도 방긋 웃으며 물었다.

   “사실 남편의 기특하고 귀여운 짓 덕분에 시작된 셈이지.”

   친구는 그녀의 남편을 잘 알고 있어서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녀 남편의 외모는 얼핏 소도둑처럼 시커먼 얼굴에 몸집은 씨름 선수처럼 거대하니 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외모와는 달리 속 깊은 구석이 있고 자상한 면도 있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도무지 그의 외모와 친구가 말하는 ‘귀여움’은 좀처럼 매치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저녁 준비를 하다가 그릇을 꺼내는데 쪽지 하나가 있는 거야. 뭔가 싶어서 꺼내봤지. 그랬더니 앙증맞게 아주 작은 카드 하나가 있더라.”

   “그걸 네 남편이 넣어둔 거야? 우와 섬세하네. 의왼걸?”

   그녀는 친구의 놀라는 표정이 사뭇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자신도 남편의 그런 귀여운 데가 있으리라곤 예산하지 못했으니, 친구의 반응이 무리는 아니다 싶어 새삼 빙긋 웃음이 났다.

   “너, 거기에 홀딱 넘어갔구나. 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다. 너희가 지금 신혼이냐? 에구 닭살!”

   질투와 호들갑을 섞어 타박하던 친구는 그 카드의 내용이 궁금해 죽겠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친구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부러움을 보며 그녀는 마치 승전보를 읽듯 말했다.

   “손톱만 한 카드에 뭐 쓸 게 있겠니.”

   짐짓 빼는 듯하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끝내 토설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걸 잘 알았다.

   “얘는, 고만 예고편만 띄우고 막을 내리는 법이 어디 있니?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든지.”

   “이렇게 썼더라. ‘늘 고생시켜 미안해. 고마워. 평생 두고두고 갚을게. 대신 천천히.’ 싱겁지? 그래도 그걸 읽었을 때는 눈물이 핑 돌더라.” 친구는 그 작은 카드에 그 정도 문장이면 어지간히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친구 남편의 솥뚜껑 같은 손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남편 저고리 주머니에 돈을 슬쩍 넣어둔 거야?”

   “겸사겸사. 옛날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나더라고. 동복 꺼내 입었는데 잊었던 돈이 들어 있으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남편도 그런 작은 행복쯤은 누리며 사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

   “부창부수다. 너의 부부. 배가 아플 만큼 부럽다.”

   카페 창밖으로 발갛게 물들은 키 작은 애기손단풍에 정겨운 햇살이 함초롬히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 누군가에게 짧은 엽서라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그립다. 그런 엽서 하나 보내는 이 없다고 투덜대기보다는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소박한 엽서 한 장 먼저 띄워야겠다. 이메일이나 문자 같은 통신수단의 속도에 비하면 구닥다리 완행열차처럼 더디 가겠지만, 그 속도만큼 많은 풍광과 사연이 그 짧은 몇 가닥 문장 속에 가득 담길 것 같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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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2012.02.22. 14:56

그냥 참 마구 행복해 집니다

그리고 백만불짜리...

제 미소도 보이시는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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