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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사관은 무용을... / 느림과 비움

오작교 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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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사관은 무용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을 내지 아니한다.


   천하에 가장 잘 싸우는 자는 싸우지 않는 자,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일 것입니다. 겨루고 싸우는 것은 유위에 속하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은 무위에 속하는 일이지요. 항상 무위에 처하는 성인은 누구와 겨루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겨루지 않으니 천하에 그와 겨룰 자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우쭐우쭐 춤추면 개들은 어둠을 향해 맹렬하게 짖습니다. 개들이 짖는 까닭은 저의 내면에 웅크린 두려움 때문이지요.

  호랑이는 짖지 않습니다. 다만 고요하게 몸을 낮춰 살피고 기다릴 뿐이지요. 정말 강한 사람들은 힘을 써서 남의 것을 취하지 않습니다. 설사 부득이하여 힘을 써서 무언가를 얻었다고 해서 얻은 것을 자랑하지도 않으며 얻은 것으로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힘쓰는 것을 내세우는 자는 힘쓰는 것으로 망하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더 강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생명 있는 것을 대할 때는 연민으로 대해야 옳지요.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때조차 노여움으로 힘을 써서는 안 될 일입니다.

   뜰의 모란꽃이 다 졌습니다. 피기는 더디나 지기는 빠른 게 꽃이지요. 모란의 선홍 꽃잎이 월경 흔적처럼 풀밭위에 낭자합니다. 모란꽃 진 뒤 영랑의 가슴 우련히 붉었던 걸 새삼 알겠습니다. 창고에 천덕꾸러기같이 굴러다니는 고무다라를 묻고 수련 심은 게 작년 봄이지요. 연초록 잎이 쑥쑥 올라오더니 이윽고 꽃도 피어났습니다.

   수련꽃 핀 걸 보고 수련꽃이 피었다고 친지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수련꽃 피고 개구리 떼 우는 밤에는 몸도 마음도 함께 고요해져 두꺼운 책 몇 권도 읽었지요.

   여름 즈음 난데없이 발굽이 두 굽으로 갈라진 축생에게 구제역이 돌았습니다. 감염된 네 발 달린 축생들 도축해서 땅에 묻느라 사람들이 땀을 흘렸지요. 굴삭기에 달라붙은 인부들은 목수건으로 이마에 돋은 땀을 닦았습니다. 서리 내리자 비로소 구제역은 멈추고 발굽 두 굽의 축생도 평화로워졌습니다.

   수련은 잎과 줄기가 시들어 거무죽죽해지더니 제자리에 주저앉았지요. 한겨울에 들여다보니 잎과 줄기가 얼음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나는 보일러를 돌리는 서재에서 노자(老子)를 읽었습니다.

   땅에서 주저앉은 자 땅에 뿌리를 내려 따뜻한 슬픔으로 한 생명을 일궈야 하지요. 단단한 얼음이 며 차례 더 응결하더니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봄비 뒤 죽은 수련 뿌리에서 새의 혀만큼 작은 잎이 올라오고 있었지요, 수련은 살아 그 작은 혀로 노래합니다! 내가 아무 힘을 보태지 않았는데도 수련은 잎이 무성해졌습니다.

   수련이 뿌리내린 연못에 개구리 한 마리가 입주했습니다. 개구리는 낮에 물 밖에 나와 햇볕을 쬐다가 내가 다가가면 인기척에 놀라 수련 잎 사위로 뛰어듭니다. 올해의 개구리는 작년 것보다 덩치가 작습니다. 나는 개구리를 염려하여 수련을 멀리서만 바라봅니다. 모란꽃 진 뒤 수련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걸 큰 보람으로 삼으려 함이지요.

글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뿌리와이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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