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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달 / 나의 치유는 너다

오작교 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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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제게 빗물을 주신다면
전 순식간에 싹을 틔울 거예요
당신이 절 도와줄 수 있다면
전 곧장 위로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빨리 떠나가지만 않는다면
우린 천상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달을 꿈꾸는 담쟁이덩굴 / 수팅


   이 시는 제목을 보면 내용이 이해된다. 중국인이라는 것 외에 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시의 내용을 보며 그가 여자일 것이라 짐작한다.

   도와주기만 한다면 날아오를 수도 있고, 하늘로 올라가 달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수팅의 시를 읽으며 나는 우리 모두는 담쟁이덩굴이면서 또 달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담쟁이덩굴이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라. 도움을 받으면서도 주기도 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니 우리 달이 되었다가, 담쟁이덩굴이 되었다가 서로의 역할을 바꿔가며 세상을 헤쳐가는 것이다.

   수팅이 담쟁이덩굴을 보며 달을 떠올린 것과 달리 나는 달을 보며 아버지 생각을 했다.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흥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지 말고 그냥 발길 따라만 가면 된다.’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도 무섭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눌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부지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보다 더 커요.’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지.’

그날밤 아버지가 지고 오던 궁핍과 달리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조금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썼던 시 ‘달빛가난’이다.

   물 같은 세월이 강처럼 흘러갔지만 아버지는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어둠을 밝히는 달 같은 존재다. 밤길 가는 내내 달이 따라와 무섭지 않듯 아버지가 지켜주는 어린 시절을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나 또한 내 아이들에게 달 같은 존재일까?

   이제는 대학생인 딸아이가 겨우 말 배울 나이 때 일이다.

   달빛에 공동묘지 앞을 지나가야 했던 시 속의 궁핍한 시절처럼 그때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글 쓰는 작가로 살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만큼 궁핍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글을 쓸 수 있는 집필실은 꿈도 꾸지 못했고, 유치원 가야 할 나이의 아이를 돌보면 집을 지키고 있기 일쑤였다. 어렸지만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어느 날 음악을 듣고 있는 내게 아이는 글썽이며 말했다.

   “불쌍한 음악을 들으면 왜 눈물이 나와 아빠?”

   스타킹을 스카팅으로, 리모콘을 리코콘으로 부르는 아이였다. 동백을 꼭 동백이로 불렀고, 바람을 꼭 바람이라 부르던 아이의 문장은 ‘우리 집이는 바람이가 불어 시원해’, ‘동백이가 꽃이 안 펴서 슬퍼’ 이런 식이었다.

   불쌍한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나온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같은 음악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피트 버턴을 눌러놓은 채 계속해서 같은 곡만 들은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이었고, 그 비감한 멜로디가 마음을 건드렸는지 아이는 음악이 불쌍해졌던 것이다.

   불쌍한 음악에 대한 기억은 내 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노래 이야기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수첩 속에 노래 가사가 하나 적혀 있었는데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옛날 가요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잇을 만큼 독특한 필체로 흘려 쓴 가사를 보는 순간 나는 금방 눈시울이 젖어왔다.

   불쌍한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나온다는 딸아이 나이 정도나 되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 마시고 오신 날은 꼭 내 얼굴에 뺨을 비벼대곤 했다. 까칠하던 그 감촉이 싫다고 도리질해도 술 취한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그럴 때 흥얼거리던 노래가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나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으로 시작하는 ‘짝사랑’ 같은 불쌍한 노래였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불렀던 노래나 좋아하던 음악은 가가 간 뒤에도 무늬처럼 어른거리며 오래오래 그 사람을 추억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이 길다는 말이 나온 건진 알 수 없지만, 산 위에 휘영청 달 떠오른 밤이면 나 또한 불쌍한 음악 때문에 눈물 흘릴 때가 있다.

   그런 눈물은 대체로 누군가를 회상하거나, 옛일이 달빛에 담겨 향수를 자아내기 때문인데, 달을 보고 느끼는 감상도 범부와 도인은 차이가 나는 건지 도겐 선사는, ‘깨달음은 풀잎 위 이슬에 비친 달과 같다’고 했다.

   풀잎 위에 앉아 있는 이슬과 그 작은 이슬에 찻잔처럼 담겨 있는 달. 그러나 이슬 속에 있지만 달은 젖을 일이 없다. 무슨 뜻으로 선사가 깨달음을 이슬에 비친 달과 같다고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범부와 달리 도인의 달에는 향수나 눈물 대신 깨달음만 비치는 모양이다. 이슬에 비쳤지만 젖지 않는 달과, 달을 암고 있으면서도 일그러지지 않는 이슬을 깨달음에 비유한 선사는 한 방울 이슬 속에 담긴 달과 하늘을 통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를 드러내고자 한 것일까?

   사람은 가도 노래는 오래 남는다. 사람을 가도 달은 여전히 떠오른다. 기울고 차오르나 꺾어지는 달을 향해 세상의 모든 담쟁이덩굴도 기어오른다. 지금 비록 담쟁이덩굴이라 해도 우리는 모두 달이 될 수 있다. 반쯤 꺾이고 기울어져 모양 일그러진다 해도 기다릴 수만 있다면 달은 또 차오른다. 만월이 내 안에서 휘영청, 밝은 빛을 내뿜는 보름이다.

글출처 : 나의 치유는 너다(김재진, 쌤앤파커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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