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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

달마 달마 783

9
● 술 / 피천득 ●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기도 하다.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알 전부이다.
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
그대 바라보고 한 숨 짓노라.

예이츠는 이런 노래를 불렀고,
바이런은 인생의 으뜸가는 것은 만취(滿醉)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백(李白)을 위시하여 술을 사랑하고
예찬하지 않은 영웅 호걸, 시인,묵객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술을 먹지 못하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름날 철철 넘는 맥주잔을 바라다보면
한숨에 들이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차라리 종교적 절제라면 나는 그 죄를 쉽사리 범하였을 것이요,
한때 미국에 있던 거와 같은 금주법(禁酒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벌금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못 먹는 것은 나의 체질 때문이다.

나는 학생 시절에 어떤 카페에서 포도주를 사 본 일이 있다.
주문을 해 놓고는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술값을 치르고 나오려니까 여급이 쫓아나오면서
왜 술을 안 마시고 그냥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할말이 없어서 그 술빛을 보느라고 샀던 거라고 하였다.
이 여급은 아연한 듯이 나를 쳐다만 보았다.
그 후 그가 어떤 나의 친구에게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내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술을 못 먹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울할 때 슬픔을 남들과 같이 술잔에 잠겨 마시지도 못하고
친한 친구를 타향에서 만나도 술 한잔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피 선생이 한잔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 한이 없다.
내가 술 먹을 줄 안다면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을 것이요,
탁 터 놓고 네냐 내냐 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도 내가 늘 맑은 정신을 갖고 있으므로
집사람은 늘 긴장해서 힘이 든다고 한다.
술 먹는 사람 같으면 술김에 아내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나에게 무엇을 사 달래서 안 된다면 그뿐이다.
아내는 자기 딸은, 술 못 먹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아이들도 내가 다른 아버지들같이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술에 취해서 돌아오면 무엇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돈도 마구 주고 어리광도 받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 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라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 볼 텐데,
"문 열어라"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 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 한바탕 하고 나면 주말여행(週末旅行)한 것 같이
기분이 전환될 텐데 딱한 일이다.
술 못 먹는 탓으로 똑똑한 내가 사람 대접 못 받는 때가 있다.
술좌석에서 맨 먼저 한두 번 나에게 술을 권하다가는
좌중에 취기가 돌면 나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저희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댄다.
요행 인정 있는 사람이나 끼어 있다면
나에게 사이다나 코카콜라를 한 병 갖다 주라고 한다.
시외같은 데 단체로 갈 때 준비하는 사람들은
술은 으례 많이 사도 음료수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 수가 많다.
간 곳이 물이 없는 곳이면
목메인 것을 참고 밥을 자꾸 씹을 수밖에 없다.

술을 못 먹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다.
회비제로 하는 연회라면
그 많은 술에 대하여 억울한 부담을 하게 된다.
공술이면 못 먹고 신세만 진다.
칵테일 파티에는 색색의 양주 이외에 주스가 있어 좋다.

남이 권하는 술을 한사코 거절하며 술잔이 내게 돌아올까봐
권하지도 않으므로 교제도 할 수 없고 아첨도 할 수 없다.
내가 술을 먹을 줄 안다면
무슨 사업을 해서 큰 돈을 잡았을지도모른다.

술 때문에 천대를 받는 내가 융숭한 환영을 받는 때가 있다.
그것은 먹은 술이 적거나 한 사람에 한 병씩 배급이 돌아갈 때다.
일정 말엽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내가 술 못 먹는 덕을 볼 때가 있다.
내가 술 못 먹는 줄 아는 제자들이
술 대신 과일이나 과자를 사다 주기 때문이다.
또 내가 술을 못 먹는 줄을 모르고 술을 사오는 손님이 있으면
그 술을 이웃 가게에 갖다 주고
초콜렛과 바꾸어 먹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지내는 내 친구 하나가
여성들에게 남달리 흥미를 많이 갖는 거와 같이
나는 술에 대하여 유달리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찹쌀 막걸리는 물론 거품을 풍기는 맥주,
빨간 포도주,
환희(歡喜) 소리를 내며 터지는 샴페인,
정식 만찬(正式晩餐) 때 식사전에 마시는 술,
이런 술들의 종류와 감정법(鑑定法)을 모조리 알고 있다.
술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 자체뿐이 아니라 술 먹는 분위기를 즐긴다.
비 오는 저녁때의 선술집, '삼양(三羊)'이나
'대하(大河)' 같은 고급 요리집,
눈 오는 밤 뒷골목 오뎅집,
젊은 학생들이 정치, 철학, 예술, 인생,
이런 것들에 대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카페,
이런 곳들을 좋아한다.
늙은이들이 새벽에 찾아가는 해장국집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것은 이십여 년 전 명월관에서
한때 제일 유명하던 기생이 따라 주던 술을
졸렬하게 안 먹은 것이요,
한번 어떤 미국 친구가 자기 서재 장 안에 비장하여 두었던
술병을 꺼내어 권하는 것을 못 받아 먹은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수 있는 술을 안 먹은 것,
앞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고 떠나는 그 분량은 참으로 막대한 것일 것이다. 
이 많은 술을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인지
또는 그만큼 생산을 아니 하게 되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솔직이 고백하면,
나는 술에 대하여 완전한 동정(童貞)은 아니다.
내가 젊었을 때 어떤 여자가 나를 껴안고
내 입을 강제로 벌려 술을 퍼부은 일이 있다.
그 결과 내 가슴에 불이 나서
의사의 왕진을 청하여 오게끔 되었었다.
내가 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쓰려면
주호(酒豪), 수주(樹州)의
≪명정 사십년(酩酊四十年)≫보다 더 길게 쓸 수도 있지만,
뉴맨 승정(僧正)이 그의 ≪신사론(紳士論)≫에 말씀하시기를,
신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더 안 쓰기로 한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 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여자를 호사 한 번 시켜 보지 못하였다.
길 가는 여자의 황홀한 화장과 찬란한 옷을 구경할 뿐이다.
애써 벌어서 잠시나마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들의 남자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밤새껏 춤도 못추어 보았다.
연애에 취해 보지도 못하고 사십여 년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을 읽느라고
나의 일생의 대부분을 허비하였다.
남이 써 놓은 책을 남에게 해석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남의 세방살이를 하면서
고대광실을 소개하는 복덕방 영감 모양으로
스물 다섯에 죽은 키츠의 ≪엔디미온≫ 이야기를 하며,
그 키츠의 죽음을 조상하는 셸리의
<아도니스> 같은 시를 강의하며 술을 못 마시고 산다


  ♪ 사랑의 모닥불 - 이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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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달마 글쓴이 2007.06.10. 23:59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것보다
이제부터 술을 즐기는것은 어떨까?
하늬바람 2007.06.11. 07:46
그 넘의 술~
술술 넘어가네~ㅋㅋㅋㅋㅋ

어제도 취하고
오늘도 취하고
언제 다 마시지~~ㅎㅎㅎㅎㅎ
즐감하고 갑니다
울타리 2007.06.11. 09:30
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술이란 정말 대단합니다.
힘, 용기, 예술, 솔직함~~~

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술에 취한듯 어질 어질합니다.
저는 오작교의 홈
좋은 글에 취하여 행복합니다.

달마님,
고맙습니다.
오작교 2007.06.11. 13:08
짝짝짝~~~
달마님.
위에 하신 말씀 잊으시면 안되옵니다.
장태산님께 재털이는 전부 치우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인데......
프리마베라 2007.06.11. 15:26
너무나 좋아했던 금아선생의 글을
이곳에서 뵙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다시한번 선생을 추모하며...
좋은글...감사합니다.
尹敏淑 2007.06.11. 15:35
달마님!!

지난 여름 장태산에서
님과 밤새우며 술잔을 주고 받았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그때 만약 술이라는게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가까 싶습니다.

이세상의 가장 진솔한친구 술을
난 죽을대까지 끊치는 않을겁니다.
님의 말씀대로 즐기며 살아야겠지요.

이번 장태산모임에서의
또 다른 추억만들기를 기대해봅니다.

달마 글쓴이 2007.06.12. 01:38
대접이주
배달다방 재떨이주
이번 정모에서는 과연 무슨주(?)가 새롭게 생산이 될련지
궁금하시진 않으신지요?
새로운 술이 생산이되지 않으면
하늘정원님깨서 제일 섭섭해 하실겁니다.

장태산님은 배달다방 재떨이주는 못마셨지요?
그래도
정모후에
회자되는 이야기는 역시 사발주, 대접이주, 재떨이주가.....단연 톱이더군요. 하하하

"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것보다
이제부터 술을 즐기는것은 어떨까? "하는 것을 가슴에 담고 참석하려합니다.
잘 될련지는 몰라도????

부엉골 2007.06.13. 06:12
나는 술을 잘 모른다
왜냐면
못마시니까
끝이다..
달마 글쓴이 2007.06.14. 00:30
( 술이란 ? )
명사이다

술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
적당히 마시면 신진대사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맥주, 청주, 막걸리 따위의 발효주와
소주, 고량주, 위스키 따위의 증류주가 있으며,
과실이나 약제를 알코올과 혼합하여 만드는 혼성주도 있다고 하네요.. 부엉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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