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늙은 아들이 돼버린 남편 ♣
결혼은 여자에게 20년 징역형이고 남자에겐 평생 집행유예라는 말이 있더군요.
저는 그 말을 하필이면 결혼식장에서 들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식장에 들어갔는데, 살다 보니 자연히 깨우치게 되더군요.
살다 보면 맞이하게 되는 부부의 골든 크로스.
수십 년 노역 끝에 자유를 찾은 여자와 이제는 늙어 주어진 약간의 자유조차 누릴 수가 없는 남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애초에 공범이었다는 점이 아닐까요?
결혼이라는 죄.
이십여년 전 사춘기 아들의 책상 서랍을 몰래 뒤진 적이 있습니다.
말수가 적어져서 도통 속을 모르겠는 아들이 한번 말문이 터지면 물불을 안 가리고 대들 때입니다.
녀석의 일기장이라도 훔쳐보면 실마리가 풀릴까 싶었던 거죠.
그런데 저는 요즘 다시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환갑의 남편이 갑자기 책상 서랍 한 칸에 자물쇠를 달았지 뭡니까?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사적인 공간은 존중해줘야 하는 줄 압니다만,
그런 원칙을 지키기엔 제 상황이 너무 절박합니다.
퇴직 이후 부쩍 예민해진 남편과의 마찰로 체중이 줄었을 정도이니까요.
이런 위기를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로 우리 부부는 대화도 했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집에서 맘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눈치 주지 않겠다고 했고,
남편 역시 대접받을 생각 버리고 아내의 자유 시간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막상 겪어보니 남편 수발들고 밥해주는 문제가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장도 같이 보고, 은행이나 관공서도 같이 다니는 등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부작용이 만만찮습니다.
저는 이제껏 남편이 저보다 판단이 빠르고 세상 물정에 밝은 줄 알았더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같이 다녀보니 남편의 말과 행동이 답답할 때가 많더군요.
공부도 남보다 잘하고, 직장에서도 남달리 오래 일했던 사람인데 어쩌면 그렇게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지요.
동사무소에서도, 마트에서도, 병원에서도 어리둥절 헤매며 시간을 지체시키기 일쑤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이없는 요구나 질문으로 담당 직원을 당황케 할 때가 많았습니다.
모르면 배워야 할 텐데 남편은 시스템이 잘못되어 있다,
서비스가 엉망이다 트집을 잡으며 젊은이들을 야단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남편을 말리지요.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당신은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오라고요.
그러면 또 남편은 버럭 화를 냅니다.
왜 사람을 말도 못하게 하느냐,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냐고요.
노년의 취미 생활을 공유해보자는 생각으로 문화센터를 같이 찾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남편은 제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과목을 정해버렸지요.
서예와 하모니카. 그런데 그 두 가지 과목을 두 달 만에 다 그만두자고 하더군요.
서예 수업에서는 글씨가 자기 생각만큼 근사하게 써지지를 않아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모니카 수업에서는 다른 수강생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시니어 강좌라 거의 우리 또래였는데도 남편은 이상하게 그들과는 거리를 두려고 하더군요.
나는 저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까요? 그런 기미를 눈치 챈 것인지, 유독 한 사람이 집요하게 말을 거는 겁니다.
싫은 기색이 분명한데도 이것저것 사적인 질문을 하며 달려드니 남편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불쾌해했습니다.
결국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다니겠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다 그만뒀습니다.
그러니 남편은 옛 친구나 동료들한테 전화가 오기만 기다리는데,
그 양반들은 또 어찌 된 일인지 다들 건강이 안 좋거나 해외의 자식들에게 가 있네요.
할 일 없이 자유로운 남편의 눈길은 자연히 저한테로 쏠리는데, 저는 그게 또 좀 부담스럽습니다.
결혼 수십년 만에야 안 사실인데 남편과는 대화가 잘 안 통하더라고요.
남편은 결국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앉더군요. 뭔가를 길게 쓰고 또 씁니다.
뭘 쓰느냐고 물으니 자서전 쓴다 왜, 합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문제의 자물쇠를 떡 하니 달아놓은 겁니다.
비밀번호를 푸는 데는 십 분도 안 걸렸습니다.
남편이 생각할 수 있는 1급 비밀번호는 항상 어머님 음력 생신이거든요.
저는 손쉽게 서랍을 열고 문제의 노트를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요즘 애들 말로 고구마 한가득이네요.
처음 몇 페이지는 자서전이 맞았습니다. 천구백 몇 년도 어느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것.
공부를 잘해서 근동의 수재로 소문이 났었고 그 어려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의 발전과 더불어 집안을 일으키며 열심히 일했던 것.
하지만 그 자서전은 마흔 언저리에서 끊겨버렸습니다. 몇 페이지 뒤에 다시 시작된 것은 푸념과 원망이었습니다.
마누라가 너무한다더군요. 작은 실수도 타박을 하고 사람의 기를 죽인다고요.
이제껏 양순한 얼굴로 속이고 있었을 뿐 남편을 무시하는 마음이 가득하답니다.
처녀 적에는 순진했는데 언제 저렇게 억세고 똑똑해졌는지 세월이 무섭다네요.
마누라와 나 사이에는 그야말로 기막힌 골든 크로스가 벌어지고 있다고 썼던데 그 말은 '막판 뒤집기'라는 뜻이죠?
그 글을 읽고 정말 제 가슴 속에는 회한의 실버 크로스가 새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보다 윗사람으로, 잘난 사람으로 생각하며 따랐던 남편. 이제 보니 늙은 아들이 되어 돌아와 있습니다.
세월은 달라졌고, 세대는 바뀌었습니다.
아마 바깥에서도 남편은 더 이상 유능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닌지 오래 됐겠지요.
사실을 마누라에게까지 들켜버린 지금 남편은 당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서랍에 달아놓은 자물쇠는 저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와서 내 마음 좀 읽어 달라고, 들여다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