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글 수 4,852
2005.06.19 01:31:00 (*.87.197.175)
1934
1 / 0




늙어가는 아내에게/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 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번호
제목
글쓴이
공지 우리 홈 게시판 사용 방법 file
오작교
126867   2022-04-26 2022-04-26 17:00
공지 테이블 매너, 어렵지 않아요 2 file
오작교
138658   2014-12-04 2021-02-04 13:44
공지 당국이 제시한 개인정보 유출 10가지 점검 사항 4 file
오작교
155730   2014-01-22 2021-02-04 13:58
공지 알아두면 유익한 생활 상식 7
오작교
156311   2013-06-27 2015-07-12 17:04
932 마누라가 오래간만에 미장원에 갔다. 2
김일경
1704 15 2006-02-27 2006-02-27 01:31
 
931 버스 안에서... 2
김일경
1688 22 2006-02-27 2006-02-27 01:29
 
930 어느 혀 짧은 아이가 있었다... 1
김일경
1673 12 2006-02-27 2006-02-27 01:26
 
929 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 복효근 3
빈지게
1722 29 2006-02-26 2006-02-26 23:18
 
928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류시화
빈지게
1668 11 2006-02-26 2006-02-26 20:23
 
927 아! 아! 금강산! 1
尹敏淑
1697 20 2006-02-26 2006-02-26 19:01
 
926 그대에게 가고 싶다/안도현 10
빈지게
1429 14 2006-02-25 2006-02-25 23:57
 
925 봄바다에 가서 물었다 / 이기철 8
빈지게
1664 11 2006-02-25 2006-02-25 23:34
 
924 오작교의 공개사과문 8
오작교
1573 13 2006-02-25 2006-02-25 22:19
 
923 한국전쟁 미공개 기록 사진 5
오작교
1680 13 2006-02-25 2006-02-25 22:11
 
922 봄이오는 소리 1
바위와구름
1539 14 2006-02-25 2006-02-25 16:43
 
921 늘상의 그런아침~ 1
도담
1645 11 2006-02-25 2006-02-25 15:55
 
920 티얼스/고미연님 1
시김새
1724 11 2006-02-25 2006-02-25 14:21
 
919 그대,바다인 까닭에 1
고암
1668 11 2006-02-25 2006-02-25 08:43
 
918 노을3" 4
하늘빛
1590 10 2006-02-25 2006-02-25 08:02
 
917 노을2 1
하늘빛
1666 11 2006-02-25 2006-02-25 08:01
 
916 노을1 1
하늘빛
1676 10 2006-02-25 2006-02-25 08:01
 
915 외로워서 사랑합니다 11
cosmos
1687 12 2006-02-25 2006-02-25 06:12
 
914 **또 하나의 숲** 12
尹敏淑
1667 5 2006-02-24 2006-02-24 18:51
 
913 살아있다는 표시는 내라 3
차영섭
1660 12 2006-02-24 2006-02-24 18:51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