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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0 21:17:40 (*.7.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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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할며니의 일기/참이슬

물끄러미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홍 할머니
추수가 끝나면 홍 할머니는  
씨앗 봉투마다 이름을 적어 놓는다

몇 년째 이 일을 반복하는 그는
혹여 내년에 자신이 심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식들이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손수 지은 농작물을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홍 할머니가
1994년 8월 18일에 쓴 일기 전문이다  

내 글은 남들이 읽으려면
말을 만들어 가며 읽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서 아무 방식도 모르고
허방지방 순서도 없이 글귀가 엉망이다

내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꽉 찼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연필을 들면 가슴이 답답하다 말은 철철 넘치는데
연필 끝은 나가지지 않는다

글씨 한 자 한 자를  꿰맞춰 쓰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모른다

그때마다  자식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글 모르는 게
내가 국민학교 문턱에라도 가 봤으면
글 쓰는 방식이라도 알았으련만
아주 일자무식이니 말이다

엉터리로라도 쓰는 것은  
아이(손주)들 학교 다닐 때 어깨 너머로
몇 자 익힌 덕분이다

자식들이나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도 못했다  
숫자는 더 깜깜이었으니까  
70이 가까워서야 손자 놈 인성이 한테
숫자 쓰는 걸 배웠다

밤늦도록 공책에 써 보았고
내 힘으로 딸네 집에 전화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건 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니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신기해서  동생네도 걸고 자식들한테도  
자주 전화를 했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며  메모도 가끔 한다  
딸들이 가끔 메모한 것을 보며 저희들끼리 죽어라 웃어댄다
멸치는‘메룻찌’로, 고등어는‘고동아’로
오만원은‘오마넌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약속 장소를 불러 주는 걸 적었는데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 호텔을    
'이슬똘 오떼로' 라고 적어서
딸이 한 동안 연구를 해야 했다

딸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며 웃는다
그러나 딸들이 웃는 것은  
이 에미를 흉보는 게 아니란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써 놓은 글들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구석 저 구석  
써놓은 글들을 숨겨 놓는다
이만큼이라도 쓰게 된 게 다행이다

이젠 손주들이 보는
글씨 큰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인어 공주도 읽었고, 자크의 콩나무도 읽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나마 쓰게 되니까
잠 안 오는 밤에 끄적끄적 몇 마디나마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말벗이 없어도 공책에다  
내 생각을 옮기니 너무 좋다

자식을 낳으면 굶더라도
공부만은 꼭 시킬 일이다

댓글
2006.02.21 01:52:24 (*.36.158.133)
cosmos
훌륭하신 할머니십니다.

12년전의 일기장...
할머니가 아직도 일기를 쓰실까요?

궁금해지고 또 뵙고도 싶어지네요
홍할머니..
댓글
2006.02.21 10:29:05 (*.159.174.223)
빈지게
가난이란 환경이 그렇게 할머니를
힘들게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
슴이 찡합니다.
지금도 가난때문에 공부하고 싶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겁니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
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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