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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이 되던 날 울고 또 울었다


▲ 경희궁 숭정전 즉위식장. <이산> 제44회 예고편.

 
ⓒ MBC  

영조 52년 3월 10일 즉 서기 1776년 4월 27일은 제22대 조선 군주인 정조 이산이 
즉위한 날이다. 행사가 열린 곳은 경희궁 숭정전이었다. 
광화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옛 경희궁 터에 남아 있는 흥화문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볼 수 있다. <영조실록>을 토대로 그날의 즉위식을 재현해
보기로 한다. 

영조 사망 5일 뒤인 이 날의 즉위식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부터 거행될 
예정이었다. 행사 시작 약 15분 전에 승전색(왕명출납 담당 내시)이 어보(국새)를 
갖고 오자, 도승지 서유린이 꿇어 앉아 받은 다음에 상서원(궁중 기물 보관처) 
관리가 이를 넘겨받아 행사장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 국상 중인 조선왕조. <이산> 제44회 예고편.

 
ⓒ MBC  

이때까지 세손은 여막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여막이란 망자의 신주 등을 모시고 
상제가 머물러 있는 초가를 말한다. 국상 중이기 때문에 세손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준비가 다 끝난 다음에 영의정  김상철 등이 승언색(세자궁 내시)을 
시켜 ‘세손’에게 “시각이 되었으니, 어서 나오십시오”라고 전했다. 
여기서 ‘세손’이란 표현을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이론상 2월 25일 0시부터 새로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는 
데에 비해, 조선왕조의 경우에는 오늘날의 미합중국처럼 즉위식 이후에 임기가 
개시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날 이산이 보좌에 오르기 전까지 영의정 김상철 
등이 여전히 ‘저하’란 호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영조 사망일로부터 즉위식까지는 조선에 군주가 없었던 셈이 된다. 

 
▲ 옛 경희궁 터에 자리 잡은 서울역사박물관.

 
ⓒ 김종성 


“저하, 나오시랍니다.”
“…….”
“저하!”
“…….”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내가 상복을 입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오장육부가 갈라지는 것 같다. 
윗사람의 명령을 어길 수 없고 아랫사람들의 간청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복종하기는 하지만, 상복을 벗고 길복으로 입으려 하니 차마 못할 짓이로다. 
이 무너지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그러는 것이니, 나를 재촉하지 말아라.”

이게 무슨 말이냐 싶어서 영의정 김상철 등이 여막으로 찾아왔다. 
몇 번을 간청하고 또 간청한다. 

“저하! 어서 나오십시오!”

그제야 세손이 상복을 벗고 곤룡포로 갈아입는다. 
대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여막을 나와 즉위식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 날의 식순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무슨 설움이 그리도 복받쳤는지 세손이 한없이 울어댔기 때문이다. 
곤룡포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 순간의 이산은 그저 할아버지 잃은 슬픔을 
억제할 수 없는 연약한 손자에 불과했다. 할아버지도 보통 할아버지인가. 
그에게는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였다. 그런 분을 잃었으니,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정조, 즉위식날 울고 또 울어

어찌 생각하면, 어차피 왕위는 따 놓은 당상이니 이 날만큼은 실컷 울어도 
되지 않았을까? 설마 즉위식 날에 왕이 바뀌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세손은 계속해서 울어대기만 한다. 

어보를 공손히 든 영의정 김상철이 “저하, 어서 받으셔야 합니다!”라며 
몇 번이나 간청을 하지만, 세손은 연방 울음을 터뜨리며 어보를 아니 받으려 
한다. 세손은 설움이 복받치고, 대신들은 애간장이 탄다. 겨우겨우 세손을 
달래어 어보를 받게 한다.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제 숭전전 어탑(왕의 보좌가 놓이는 곳)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세손이 어탑 아래에 서 있다. 백관들은 좌우로 시립(侍立)해 있다. 
예정 시각이 한참 지난 뒤였다. 햇볕이 유난히 따사롭기만 한 봄날 정오였다. 
하늘의 태양도 이산의 등극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모른다. 


▲ 어탑이 놓일 장소. 어탑까지 가자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사진은 덕수궁 중화전의 모습.

 
ⓒ 김종성  

이제 저 어탑에만 오르면 된다. 그곳에 올라 백관들의 절을 받으면 공식적으로 
조선의 군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손이 또 멈추고 만다. 그리고는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대체 오늘따라 왜 저러시는 거지? 그동안 잘도 참으시더니.’
홍국영의 눈도 촉촉해지지 않았을까?
이번에도 세손이 울음을 멈추지 않자 대신들이 달려간다. 
“저하의 심정을 저희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 일은 예전부터 임금이 
행해온 의식입니다. 선왕의 뜻을 생각하시어 제발 슬픔을 억누르고 자리에 
오르십시오.”

“…….”

“저하!”

“이제 이곳에 오니 가슴이 찢어집니다. 
내 어찌 이렇게 갑자기 저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 말을 하고는 세손이 또 울어댄다. 
좌포청 다모 채옥을 바라보는 종사관 황보윤의 눈빛, 
도화서 다모 성송연을 바라보는 세손의 눈빛 같은 그런 눈빛이 오늘따라 
한없는 눈물에 잠겨 있다. 세손이 이렇게 울어대자 신하들까지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고 <영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임금도 울고 신하들도 울고...

안 되겠다 싶었던지, 영의정 김상철이 이번에는 좀 센 어조로 나온다. 
약간 협박조의 말이다. 

“이것은 종사(宗社)의 중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애통 때문에 중요한 일을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서 오르세요.”

영의정이 갑자기 협박조로 나오니까 세손도 은근히 반발심이 좀 생겼던 
모양이다. 

“경들은 내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어찌 이리 날 강박하는 겁니까?”

그 말을 마치고는 또 울어댄다. 
영의정 김상철도 함께 울면서 계속 간청한다. 

“이 자리는 선왕의 자리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 자리를 항상 우러러보며 살아왔으니, 
내 어찌 이 자리에 오르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 차마 오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경들은 제발 나를 강박하지 마세요.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달란 말이오.”

제발 나를 억지로 앉히지 말라고 했다. 
내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좀 기다려달라고 도리어 사정하는 것이었다.  


▲ 세손이 어탑에 오르자 하례를 올리는 신하들. <이산> 제44회 예고편.

 
ⓒ MBC 

“내 어찌 이 자리에 오르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란 그 말에 홍국영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동궁전에서 세손과 함께 등극을 
준비해온 홍국영. ‘이제 저하께서 정치 감각을 좀 차리셨구나. 
곧 올라가시겠군’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지는 않았을까?

“이 애통하신 하교를 받으오니, 저희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시각이 이미 늦었고, 신민(臣民)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의식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김상철 등이 이 말을 마친 후에 세손은 결국 어좌에 올랐다. 
그곳에 올라 백관의 절을 받았다. 공식적인 조선의 군주가 된 것이다. 

이제 이산은 세손이 아니라 주상이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늘 높이 
쳐들고 그는 자신이 조선의 새 군주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조선 제22대 군주 정조의 즉위식장은 그렇게 ‘눈물의 바다’였다. 
이제껏 ‘고난의 땅’을 밟아온 이산이 ‘눈물의 바다’를 건너 또 다른 
‘수난의 땅’으로 향하는 의식이었다

댓글
2008.02.18 15:02:01 (*.204.44.1)
오작교
좋은 자료를 애써서 모아 주셨군요.
아직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
2008.02.18 17:51:51 (*.202.144.125)
Ador
사극의 묘미를 한껏 즐긴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몇마디의 대사를 읽으면서도 그 무게를 가늠하여집니다~
올려주신 수고, 감사합니다.
댓글
2008.02.19 15:50:40 (*.234.128.69)
반글라
오래전 역사시간에 배운게
조선 27대 왕중에 대왕이란 용어로 칭하는게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란 걸 배운적이 있었습니다.
까마득히 오랜세월동안 이제사 재삼 느껴봅니다.

영원한제국이라는 영조실록에 관한 영화도 10여년전에
나온것 같은데..
mbc 드라마로도 나오는군요.
좋은자료를 또 한번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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