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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孤 / 전정표
흔들리는 마음들
episode 14
아득한 옛날, 영국에 고탐(Gothom)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바보들만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는 조그만 강이 하나 흐르고, 그 강을 작은 다리 하나가 연결해주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시장을 보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시장에 가기 위해 건너오는 사람과 중간에서 마주쳤다. 마을로 돌아오던 사람이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길인가?" "양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는 길이네." "양을 사러? 그럼 사가지고 올 때 어느 길로 지나갈 텐가?" "그야 당연히 이 다리로 건너야지." "그러면 내가 한참 동안이나 길을 비켜주고 있어야 하잖아?" 내가 바쁜 일이 있어 그러니 자네는 이 다리로 오지 말고 다른 곳으로 돌아올 수 없겠나?" "안 되네, 그 많은 양들을 데리고 도대체 어디까지 돌아가라는 말인가? 난 이 길로 올 것이네."
그 둘은 마치 지금 양떼가 옆에 있기라도 한 듯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둥', '돌아가라는 둥' 옥신각신 다투었다.
그때 다른 한 사내가 밀가루 포대를 말에 싣고 장에서 돌아오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사내는 양떼를 몰고 다리를 건너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 하는 소리를 듣고는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양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는 발길을 멈추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 친구들아, 자네들 지금 뭘 하고 있나? 잠깐 와서 이 포대 내리는 것이나 좀 도와주게."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은 사내는 갑자기 포대를 거꾸로 엎어 애써 사온 밀가루를 다 쏟아 버렸다. 그리고는 빈 포대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 사람들아, 도대체 왜 있지도 않은 양을 놓고 지나간다, 못 지나간다 하며 다투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이 빈 포대를 놓고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다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지."
theme essay
우리는 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원치도 않은 행동을 하게 되곤 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푸념한다. "나는 원래 그러려고 않았는데"라면서.
저 고탐 마을의 세 바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투고 밀가루를 강에다 전부 버리는 난리법석을 피웠을까? 혹 이 사람의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놓고 서로 미워하고 다투면서 스스로 본래의 마음들을 잃어 버리고 사는 오늘날 우리네의 이야기는 아닐까?
모두 잠든 한밤중에 깨어 있을 때, 귓가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차바퀴 소리, 아련히 들려오는 사람들 소리, 모든 소리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바쁜 하루가 시작되고 사람들 속에 부대끼다보면 어젯밤의 고요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작은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 그리고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다시 밤이 찾아오고 차분한 고요의 시간이 다가오면 마치 딴 사람이나 된 듯 지난 낮 동안의 일들이 허망스럽고 우습게 여겨질 때가 참으로 많다. '그땐 왜 그랬을까?' 하면서······.
마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옛부터 생각하는 기능은 머리에 있고 느끼는 기능은 가슴에 있다 하여, 중국에서는 마음의 글자를 심장의 모양을 본떠 마음 심(心)으로 썼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처럼 늘 위태로이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우리의 마음들. 반복되는 흔들림 속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예정된 아픔들. 과연 이 흔들리는 우리네 마음자리의 고향은 어디쯤일까? 정말 한 주먹만큼밖에 안 되는 심장이 우리 마음의 고향일까?
이번 이야기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말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육조 혜능이, 스승인 홍인선사로부터 의발을 건네받고 남쪽으로 내려가 수행을 하던 중 있었던 일이다.
한번은 남해 법성사에 열반경 강의의 권위자인 인종스님이 마침 큰 법회를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혜능이 법성사를 찾아갔다. 혜능이 법성사 절 문 앞에 이르렀을 때 한쪽에서 두 젊은 중이 다투고 있었다. 그들은 절 문 앞에 세워놓은 절 표시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며 서로 다투는 것이었다.
한 중은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라고 하였으며, 다른 한 중은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깃발이 흔들린다는 중이 말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바위나 산은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네. 그 것의 주체가 깃발인 까닭에 흔들리는 것이니, 결국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란 말일세."
바람이 흔들린다고 했던 중이 곧 반박하였다. "이 세상에 근원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네. 만일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그것이 깃발이든 갈대든 흔들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바람이 흔들린다는 것이 옳은 이치일세."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며 둘의 논쟁은 점점 가열되고 있었다. 그러다 절 앞에 서서 자신들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혜능을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와 자신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논쟁의 요지를 설명하고 누가 옳은지 판결을 내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혜능선사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한참 동안 두 승려를 쳐다보던 혜능이 그들에게 물었다.
"정말 그 대답이 그렇게 듣고 싶은가?" 두 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앞으로 더 들이밀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라네. 단지 그대들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지."
요즘 젊은 남녀들 사이에는 한 달 기념이다 백 일 기념이다 일 주년 기념이다 하면서 만남을 자축하는 파티가 유행이라고 한다. 서로 만난 지 한달이나 백 일, 일 주년을 기념하여 반지도 맞추고 선물도 교환하면서 축제인 양 즐긴다고 한다. 마치 그동안 오래(?) 잘 사귀며 넘어왔다는 듯. 사랑이 흔해지면서 점점 만남이 그 소중한 의미를 잃은 탓일까? 아니면 우스갯소리로 쌍둥이도 세대 차이가 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변화무쌍하고 신속한 오늘날의 사회구조 때문일까?
물론 예전부터 젊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은 늘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또 첫사랑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속설이 나올 정도로 젊은 남녀의 만남은 늘 흔들리며 위태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 이젠 백 일, 아니 한 달 기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백 일이면 오래가는 커플로 여겨질지도 모를 세상이 되어 버렸다.
헤어지는 이유의 거의 대부분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작은 불신으로 인해 생긴 갈등으로, 서로 다투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바람에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다가 골이 깊어져 종내는 마음이 식어 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이해와 포용이며 또한 믿음이라고 아주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건만 어째서 그렇게 쉽고 허무하게 갈라서 버리고 마는 걸까?
수 년을 알고 지냈고, 한 달 삼십 일을 하루같이 만나왔고, 매일 수 시간씩 전화를 주고받았던 사이건만. 조그만 사건 하나, 작은 오해의 꼬투리 하나에도 의심하고 질투하다가 급기야 상대를 무시하고 비난하기까지에 이른다. 또 십수 년을 친한 친구로 같이 어울려다니던 사이도 작은 오해로 다투고 헤어져 죽을 때까지 영영 아니 만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인간이란 본시 이렇게 간사하게 생겨먹은 것이란 말인가? 우리네 삶의 자리가 수십 년의 만남, 진실하고 뜨거웠던 사랑 등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흔들리고 심하게 요동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법성사 문 앞의 젊은 두 중들처럼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에서 그저 눈으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판단하며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절 문 앞에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느끼고 나부끼는 그 모습을 완상(玩賞)하고, 부는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그 시원함에 감사했다면 다툼이나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남에서 자꾸 머리로 이것저것을 재고 가려내려 한 탓에, 실상 상대와의 마음의 교감에는 둔감해져 있었던 탓에 단 한 번의 오해로 갈라져 버리고 만다. 심지어 부부로 수십 년을 살았어도 머리로 알았기에 안 것은 안 것이 아니요, 봤다고 하는 것은 본 것이 아니었기에 조그만 오해로도 태산이 무너져 버린다.
그렇다. 요동치고 나부끼는 이 흔들림의 근본 원인은 타인의 행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꼴에 있었던 것이다.
신문의 사회 문화면을 보다보면 가끔 의아해지곤 한다. 피라미드 판매에 수천만 원을 사기당했느니 사이비 종교에 속았느니 하는 등의 어이없이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기사로 다루어지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들도 꽤 많이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나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의 허황되고 허점이 많은 이야기들에 속아 어처구니없이 사기를 당한다는 사실이 이상스럽기만 하다.
혹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들에게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헛된 부에 대한 욕망, 한탕 크게 먹어보겠다는 야망,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 이 세상은 모두 썩었다는 극단적 편견,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독선 등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까닭에 아주 간단한 사기 행각이나 허황된 교리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송두리째 속아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오해와 갈등은 먼저 내 머리와 가슴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헛된 그림자에 눈과 마음이 어두워져 필요 없이 계산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거듭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랑과 평화를 원하면서도 늘 오해와 갈등 속에 피곤하게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농구 해설자로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슈터, 소위 슛도사라고 불리던 이충희 선수가 K대학교 농구선수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K대학교는 무려 49연승의 신화를 만들었으며 과연 그 연승의 행진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이 세인들의 관심사였다.
그런 가운데 D대학과의 시합이 벌어졌다. 당시 D대학은 아주 약체로 평가되는 팀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K대학의 연승기록 연장과 몇 점차에 승부가 날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헌데 경기가 진행되면서 상황은 세인의 예측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D대학의 선수들은 K대학과 대등한 경기를 이끌고 있었다. 어차피 이기기 힘든 상대이니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실력껏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비운 채 편안히 코트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D대학 선수들은 놀랍도록 선전하고 있었다. 반면 연승기록 추가의 부담을 가진 K대학 선수들은 눈에 띄게 몸놀림이 둔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경기 종료를 몇 초 안 남기고 두 팀은 동점을 이룬 가운데 D대학은 절대절명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종료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상대팀의 파울로 자유투 두 개를 얻은 것이다. 이제 다시 만회할 시간이 없기에 자유투 두 개 중 하나만 성공시키면 勝利하는 것이었다. 무명의 최약체가 무적함대를 격파시키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함성 소리와 함께 첫 번째 공이 선수의 손을 떠나 바스켓을 향해 날아갔다. 실패였다. 공은 링을 맞고 밖으로 튕겨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공은 이번에도 링 주위를 한 바퀴 빙그르 돌더니 밖으로 떨어져내렸다. 결국 두 팀은 비기고 말았다.
좋은 컨디션으로 잘 뛰고 있었고, 80% 이상의 자유투 성공률을 가지고 있던 그 선수가 두 번 모두 어이없이 실패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공을 던지기에 앞서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둘 중에 하나만 넣어도 우리가 이긴다, 무적의 신화를 내 손으로 깨는 것이다, 등등의 생각에 그만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절 문 앞에서 두 젊은 중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고탐 마을의 두 남자들, 아니 세 남자들은 또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욕망, 지식, 명예, 관념들의 질기디 질긴 끈들. 그 끈들에 매여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부꼈을 삶의 편린들······.
마음을 재웠으면 한다. 욕망도 재우고 머리 속에 담아둔 수많은 지식과 관념들을 모두 재워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빈 마음이되어 더 이상 현상이 빚어낸 그림자 놀이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연 현상이나 물질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뚜렷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선문답들이 다 그렇듯이 이론과 논쟁으로 따지고 드는 말 익은 이들에게 영혼의 정수박이에 들이박히는 스승의 날 선 검! 그것이 스승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절대적 말 힘을 가졌다는 여섯 번째 조사 대감 혜능스님의 경우에서야 더할 나위가 없다. 세상사의 거센 바람결과 사람 사이에서 상처받고, 눈물 젖은 우리의 육신 위에 일천사백 년을 거슬러, 이제 혜능스님이 우리에게 던지신 한마디는 이러했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라네. 지금 그대들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네."
- '뒤주 속의 성자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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