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기타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동행 4281

0
윤은희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 윤은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09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공유
0
댓글 등록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번호 시인이름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오작교 기타 태그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오작교 10.09.12.22:57 97830 0
공지 기타 이 방의 방장님은 동행님입니다. 6 오작교 08.10.05.21:25 94636 +62
공지 기타 이 게시판에 대하여 2 오작교 08.05.18.21:33 101919 +73
103 기타
normal
은하수 09.06.03.00:54 2997 +18
102 기타
normal
동행 09.04.25.07:50 2367 +22
101 기타
normal
아미소 09.04.22.12:13 2230 +22
100 기타
normal
동행 09.04.19.06:44 4280 +27
99 기타
normal
동행 09.04.16.01:03 4162 +27
98 기타
normal
동행 09.04.05.22:56 2054 +21
97 기타
normal
장길산 09.04.01.10:31 2218 +23
96 기타
normal
동행 09.03.26.23:13 4082 +42
기타
normal
동행 09.03.26.23:10 4281 +32
94 기타
normal
보리피리 09.03.20.15:59 2182 +21
93 기타
normal
동행 09.03.09.08:19 2615 +11
92 기타
normal
동행 09.03.09.08:14 2316 +11
91 기타
normal
동행 09.03.09.08:10 1734 +15
90 기타
normal
동행 09.03.04.09:07 1679 +15
89 기타
normal
동행 09.02.24.08:23 2369 +14
88 기타
normal
동행 09.02.24.08:18 1728 +15
87 기타
normal
동행 09.02.15.20:32 2562 +14
86 기타
normal
동행 09.02.15.18:51 2405 +13
85 기타
normal
우먼 09.01.27.19:49 4108 +27
84 기타
normal
2
동행 09.01.27.00:27 195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