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의 조선의 비주류 인생]


양반 남자가 비구니를 유혹하며 주고받은 가사인 ‘승가’와 의금부 도사 남휘의 관계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가사 작품 가운데 ‘승가’(僧歌)란 것이 있다. 4편의 연작으로, 제목만 놓고 보면 ‘스님의 노래’이므로 승려가 지은 불교가사로 보인다. 국문학계에서는 실제로 꽤 오랫동안 특이한 불교가사로 간주해왔다.
 
굳이 특이하다고 말한 이유는 이 작품이 불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라 거꾸로 불도를 잘 닦고 있는 여승을 세속의 양반 남자가 유혹해 환속시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승과 주고받은 연애편지

    - 한강변에서 마주친 그대를 못 잊어

    성(聖)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속인과 사랑한 뒤 파계하는 제재는 동서양 문학에서 드물지 않다.

    남자가 여자를 파계시키기도, 여자가 남자를 파계시키기도 한다.

    이 노래는 도봉산 망월사라는, 지금도 잘 유지되는 절에 사는 비구니를 한 남자가 파계시키는 내용이다. 망월사에서 한강변을 따라 길을 나선 여승을 한 남자가 우연히 보았다.

    남자는 동대문 근처까지 동행한 뒤 여승을 잊지 못하고 구애하는 가사를 지어 망월사에 보냈다. 여승은 불도를 닦는 처지임을 들어 거절했으나 남자는 자기와 살자는 가사를 다시 지어 보냈다. 두 번의 구애를 받고 여승은 마침내 승낙하는 가사를 보냈다. 비구니는 성(聖)과 속(俗)의 갈등에서 결국 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연만도 흥미로운데다 편지로 왕복한 대화 형식도 신선하다.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지는 않았으나 특이한 가사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어와 보고 싶네. 저 선사(禪師) 보고 싶네. 반갑기도 그지없고 기쁘기도 측량없네. 네 여인의 고운 모습으로 남자복색 무슨 일인가. 저렇듯이 고운 얼굴 은누비에 쌓인 모양, 삼오야 밝은 달이 떼구름에 싸였는 듯, 납설(臘雪) 중에 한매화(寒梅花)가 노송에 걸렸는 듯.”

    처음 본 여승의 미모에 반해 들뜬 심경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자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이본이 남아 있어 꽤 흔하게 불린 가사임을 알 수 있지만 작자를 보여주는 정보는 거의 없다. 남도사(南都事) 또는 남철로 작자명이 쓰인 것이 있어 남씨 성의 양반 사대부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그런데 <추재기이>에는 창작된 배경과 동기를 보여주는 ‘삼첩승가’(三疊僧歌)란 기사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인즉 이렇다.

    “남 참판(南參判)이 소년 시절에 길을 가다 여승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잊지 못해 긴 노래를 지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호소했다. 그 여자도 답하는 노래를 지어 세 편을 주고받았다. 이후 그 여자가 머리를 기르고 남씨 집안의 첩이 되었다. 지금도 승가 세 편이 세상에 전해진다.”

    이 기록을 현재 각종 노래집에 실린 가사와 견주어보면 정확하게 부합한다. 조수삼은 분명히 승가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많이 불리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노래에 얽힌 사연까지 잘 알려졌으므로 <추재기이>에 실었다.

    여기까지는 학계에서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많은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이 노래의 작자를 찾게 되었다. 임천상(任天常·1754~1822)이 편찬한 <시필>(試筆)이란 책에 승가의 작자와 그의 특이한 행적을 기록한 대목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들면 이렇다.

    “도사(都事) 남휘(南徽)는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의기(意氣)를 좋아했다. 소싯적에는 방탕하게 놀기를 즐겨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승을 만났는데 몹시 아름다웠다. 승가를 지어 유혹하여 마침내 집에 데리고 와 첩을 삼았다.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승가가 바로 이것이다.”

    “가슴에 불이 난다”며 “살려달라”

    의금부 도사를 지낸 남휘란 사람이 승가를 지은 작자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다른 내용은 <추재기이>와 비슷하다. 매우 신뢰할 만한 사료이기에 이를 바탕으로 남휘를 추적해보았다. 뜻밖에도 오래된 족보를 비롯해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그의 행적이 제법 많이 실려 있었다.

    그는 1671년에 태어나 1732년에 죽은 양반으로 당시에는 유명세를 탄 인물이었다. 병자호란 때 전사한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증손자로 무인 집안 출신이며, 또 친척 가운데 무인이 많았다. 그도 병법을 잘 알고 무인의 자질이 있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권무청(勸武廳)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남휘 본인은 무인으로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고 문학에 힘써 1708년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했다. 도중에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아 조정에서는 그를 유배 보내자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했다. 후에는 부장에서 의금부 도사로 직책을 바꿔 근무했다. 그는 참판을 지내지는 않았는데 조수삼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호방한 무인의 풍모와 문장을 갖춘 인물이었다.

    여승에게 “세상에 갓 쓴 사람 나뿐이라 하랴마는 문무겸전(文武兼全) 호걸사(豪傑士)야 우리밖에 또 있느냐”고 자랑한 것이 허황한 거짓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번듯한 문집을 남긴 사람은 아니었으나 문학을 향한 의욕이 구애 편지를 가사로 쓰게 만들었던 듯하다.

    그런 남휘가 일반 여성이 아닌 여승을 유혹해 첩으로 삼은 동기가 어디에 있을까? 그는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 있었다. 임천상이 지적한 것처럼, 소싯적에는 방탕하게 놀기를 즐겼고,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게다가 만년에 유명한 거부가 된 것으로 보아 젊어서도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이미 결혼해 부인이 있었으나 20대 젊은 나이에 여승을 보고 미모에 반해 구애를 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난봉꾼이라고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으나 당시에는 용인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여승이란 것이 특별했다.

    한편, 그는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숙종대왕을 알현까지 했으나 부장을 수행할 마음이 없다며 출근도 하지 않을 만큼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집안 좋고 인물 좋고 부유하고 성정이 호방하기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자 망설이지 않고 첩으로 삼으려 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을 유혹하고 설득했을까?

    “두미(斗尾) 월계(月溪) 좁은 길에 남 없이 둘이 만나 추파(秋波)를 보낼 적에 눈에 가시 되었단 말인가. 광나루 함께 건너 마장문(馬場門) 돌아들 때 그이 가는 길이 남북으로 나뉘었소. 단순호치(丹脣晧齒) 반개(半開)하고 삼절죽장(三節竹杖) 잠깐 들어 ‘평안이 행차하시오 후일 다시 보사이다.’ 말가죽 잡고 바라보니 한없는 정이로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 가슴에 불이 난다.  한 걸음 두 걸음에 길이 점점 멀어가니 이 전에 걷던 말이 어이 그리 빨라졌나.”

    여승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반했는지를 고백한 대목이다. 그러더니 마지막 대목에서는

    “왼손편 못 울기는 옛말도 들었더니 짝사랑 외기러기 나 혼자뿐이로다. 선사님 생각해보소. 내 아니 가련한가. 우연히 만나보고 무죄하게 죽게 되니 이것이 뉘 탓인가. 불상치도 않은가 저근듯 생각하여 다시금 생각해보소. 대장부 한 목숨을 살려주면 어떠할꼬”라며 아예 강짜를 놓는 투다.

    너 때문에 나 죽게 됐으니 내 목숨 좀 살려달라는 하소연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작업’을 거는 바람둥이의 허튼 수작에 불과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수작에 여승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한 몸 바치나니 하실 대로 하소서”

    “어와 뉘시던가. 경화(京華) 호걸 아니신가. 내 이름 언제 듣고 내 얼굴 언제 봤는가. 무심히 가는 중을 반기기는 무슨 일인가. 머리 깎은 중의 얼굴 덜 미운 데 어디인데 저렇듯이 눈에 들어 병이 차마 난단 말인가”라며 당혹스럽다는 듯이 서두를 꺼낸 뒤 답장을 받고 보니 마음이 산란하다고 말하고는 결연히 거절하는 답서를 역시 가사체로 써서 보냈다.

    “날 같은 인생을 생각도 마르시고 의술을 모르거든 남의 병을 어이 알고 인명이 재천(在天)커든 내 어이 살려내리. 천금 같은 귀한 몸을 부질없이 상치 말고 공명에 뜻을 두어 속절없이 잊으시고 무관한 중의 몸을 더럽게 아옵시고 영화로 지내다가 홍안분면(紅顔粉面) 고운 님을 다시 얻어 구하셔서 천세나 누리소서”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남휘는 다시

    “아마도 선사님 만나 운우정(雲雨情)을 맺게 되면 약 아니라도 나으려니 선사님 덕이 될까 하노라”는 가사를 지어 보냈고,

    여승은 마침내 “장부일언은 쳔년불괴(千年不壞)라. 여러 말 쓰르치고 일언에 결(決)하나니 믿나니 낭군이요 바라나니 후사(後事)로다. 한 몸 바치나니 하실 대로 하소서”라고 승낙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때 여승은 나이 22살이었다. 남휘도 그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그러면 1690년대 초반에 둘 사이에 사연이 발생했을 것이다. 남휘가 부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유치한 사랑 타령 같기도 하나 300년 전 젊은 연인이 연애하는 구체적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비슷한 신분의 젊은 남성과 여성이 나눈 사랑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반집 남성과 당시로서는 신분이 천했던 여승의 처지이므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 가사가 당시부터 대단히 인기가 있었고 그로부터 거의 200년 동안이나 널리 불렸다. 남녀 사이에 오간 비밀스런 구애의 가사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남휘는 평범한 사대부와는 달리 기걸하고 호방한 사람으로서 자신과 첩 사이에 오간 가사를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남들에게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가사가 널리 세상에 퍼졌을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그들의 사연이 지금도 흥미롭지만 당시에는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으리라.

    이 승가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사랑을 직접적으로 고백한 가사가 없었다. 남녀 간 사랑을 다룬 가사라고 해야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처럼 남성이 여성 화자가 되어 군주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연군가사가 있을 뿐이었다.

    승가는 남녀 사이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거의 최초의 가사다.

    구체적 상대를 향해 구애하는 호소력 강한 작품이다. 도덕과 충성, 자연 애호와 은둔을 주제로 하는 사대부의 점잖은 가사에 비교하면 이 가사는 그야말로 풍속을 해치는 도전적인 가사였으리라. 그러나 그 점이 바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해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대중의 심리를 파고든 새로운 주제이자 감동적인 내용이 아니었을까?

    남휘와 여승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전하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남휘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뒤 재산 증식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그가 죽던 해 <승정원일기>에는 부평부사가 그에게 600석의 쌀을 빌려 문제가 된 사건이 나온다. 그만큼 그는 부자로 인정받은 듯하다.

    <시필>에도 거부인 그의 특이한 행적이 두 건이나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음 이야기다.

    “남 도사는 거부가 되었다. 누군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묻자 남 도사는 뜰에 서 있는 나무로 올라가라 하고 양손으로 가지를 잡은 채 허공에 매달리라고 했다. 곧이어 한 주먹을 놓게 하고, 또 한 주먹을 놓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놀라면서 ‘그러면 낙상합니다!’라고 하자 남도사는 그제야 ‘내려오게! 그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야. 돈 한 푼 쓸 때도 그 주먹을 놓듯이 하게!’라고 말했다.”

    슬하의 서녀 셋, 여승의 아이일까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가 바로 남휘의 사연이다. 그는 박규문(朴奎文)·이장(李樟)과 함께 경기 부천시의 옛 이름인 계양(桂陽)의 호걸로 불렸다고 전한다. 족보에는 슬하에 서녀(庶女) 셋을 두었다고 나와 있다. 여승과 사이에서 나은 소생이 들어 있을 법도 하다.

    한때 문무 겸전한 호남아로, 나이 들어서는 거부라는 명성을 누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남휘란 이름은 사라지고 그저 남 도사란 범칭으로 불렸다. 다른 모든 명성은 사라지고, 젊은 시절 호기로운 구애의 도구로 썼던 가사만이 세상에 오래 전해져 큰 인기를 누렸다. 문학의 힘은 이런 데 살아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