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봄날은 간다/이향아


누가 맨처음 했던가 몰라
너무 흔해서 싱겁기 짝이 없는 말
인생은 짧은 여름밤의 꿈이라고
짧은 여름밤의 꿈같은 인생
불꽃처럼 살고싶어 바장이던 날
누가 다시 흔들어 깨웠는지 몰라
강물은 바다에서 만나게 될거라고
실개천 흘러서 바다로 가는길
엎드려 흐느끼는 나의 종교여
나를 아직도 용서할수 있는지
꽃이 지는 봄
땅위에 물구나무 서서
영원의 바다같은 하늘을 질러
나,이제 길을 떠나도 돌아올수 있는지
봄날은 간다...
탈없이 간다...




2.이승훈/ 봄날은 간다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리도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않는다 봄날은 가고 당신은 가지 않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3.허수경/ 봄날은 간다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4.기형도/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런지




5.이응준/ 봄날은 간다


스무살에 부르던 투쟁가처럼 꽃이 핀다
그러나 꽃을 노래하지는 말아라
괴로운건 꽃이 아니다
꽃을 가지고 싶은
꺾이기 쉬운
멍들어 가는
청춘이다


붉은 꽃을 보고 있는 사형수의 마음 같은



6.황동규/ 봄날은 간다


배가 속력을 늦춘다
제부도 앞바다 봄날 해질녘
꽃불.
바람섬 승봉성 이작섬 벌섬 동백섬
앞에 떠도는 꽃불 서로 먼저 건지려다
옆 섬에게 자리를 내주며 한 발 물러서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결 한껏 성글어진다
인간들이 저리 정답게 노는 광경 본 게 언제지?
빗물 얼룩진 유리 훔치듯
눈을 훔치면
수평선이 섬들 사이로 홍옥 끈처럼 흘러 들어와
섬의 허리들을 가볍게 맨다
자 허리의 끈을 당겨라!
학처럼 날기 시작하는 섬들
쿵쿵대는 바다의 심장 박동
이 순간만은
신의 눈길과 인간의 눈길 가르기 힘들리
눈길 서로 헷갈릴까
인간의 눈을 잠시 시야 밖으로 밀어놓는다




7.안도현/ 봄날은 간다


(....)
어느 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을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