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벼슬이 높아야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 고택을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으면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문가가 아니면 고택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집을 팔지 않았다는 것은 경제적 여유와 집안에 대한 자존심을 가졌음을 대변한다. 살기 편한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고 유지와 관리가 힘든 전통 한옥에 거주하는 사람은 이 고택이 배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나름의 철학과 신념 즉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좋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이 나오고, 좋은 사람이 좋은 장소를 유지한다. 집과 사람은 상생관계에 있다.
  비오는 날 최부자를 만난 행인들은 젖은 바닥임에도 불구, 엎드려 인사했다는 미담이 있다. 9대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만석을 한 집안으로 조선 팔도에 널지 알려진 최부자 가문은 졸부가 아닌 명부로 12대 동안 만석을 유지했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나름의 철학과 경륜에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만석 이상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상도 지역의 금원산은 오행으로 보면 화기(火氣)와 금기(金氣)가 4대 6정도로 섞인 화금체산이다. 땅의 기운이 강한 곳에 집을 지으면 가위에 눌리거나 병이 드는 경우가 있어 절이나 수도원을 지어야 제격인데 이런 강한 기운을 조산으로 선조, 광해, 인조 등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동계 정온 집안인 동계 고택이 들어서 인재를 배출했다. 이처럼 기가 강한 금원산을 조산으로 동계고택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단단한 양(陽)에 부드러운 음(陰)이 함께 하는 양정음의 이치 때문이다.
  현재 장남 윤상구 씨가 거주하고 있는 안국동 고택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구한말 민씨 성을 가진 대감이 지은 집이다. 인품이 훌륭해 민 부처라는 별명 가졌던 그가 99칸이 넘는 저택을 짓게 되자 그 소문이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종이 민씨를 불러 ‘대궐을 지어 반역할 것이나’고 묻자 그는 “이 집은 부처가 살 집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답변했다고 한다. 안국동은 서울의 대표적 명당 지역인데 윤보선 고택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명택이다. 이를 증명하듯 이 집은 윤보선 전대통령이라는 큰 인물을 키워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한국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 중 50인이 이 집안 윤씨들이다.
  죽산 박씨들이 500년 동안 살아온 남원시 수지면에 몽심재라는 유명한 고택이 있다. 몽심재를 중심으로 90여 가구 남짓한 죽산 박시 집성촌에서 다수의 성직자 및 종교 종사자가 배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리산은 그 둘레 길이가 500리가 넘는 한국 최대의 덕산이기 때문이다. 몽심재는 과객 대접을 극진히 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조선시대 대갓집에서 중시한 일 두 가지는 조상의 제사 충실하게 지내는 것과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일이다. 베풀수록 집안을 오래 유지할 수 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불교의 인과응보, 윤회 사상과 집안을 중시하는 유교 전통이 서로 결합된 생각이다.
  대만의 남희근 선생에 의하면 덕을 쌓고 명리와 풍수를 알고 책을 많이 읽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독서를 하면 좋은 팔자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증명하듯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남평 문씨 집안은 ‘인수문고'라는 집안 공동 문고인 문중문고를 세워 독서에 매진했다. 2만권 고서를 수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인 이 문고는 부보다 지혜를 중요시한 집안의 철학을 대변한다. 인수문고는 8천 500책(2만권 분량)을 수장하는데 민간으로서는 고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문고로 전국의 문인들이 이곳에 찾아와 책을 읽고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조용헌 박사가 생각하는 ‘녹색의 장원’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터의 호방함이 두드러지는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다. 이 호방함을 놓고 보면 이 집이 한국을 대표하는 고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윤선도 고택은 사신사(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면적)내의 면적이 무려 50만 평이다. 넓은 평야가 많은 호남이라 가능한 조건이다. 상대적으로 영남 지역은 산이 많고 들판이 좁아 집터가 오밀조밀한 편이다.
  조용헌 박사는 “집안을 유지하려면 사람이 잘 나와야한다”며 “철학과 도덕성을 가진 상류사회가 존재할수록 그 사회는 안정된 사회이고 아울러 사회구성원 전체의 질이 올라간다.”고 강조한다. 업보를 이해하고 바람과 물의 원리를 알고 중요한 일에 앞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덕을 쌓아야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살았던 인생과 기질, 무의식도 세대를 타고 유전된다고 하니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조용헌 박사는
1961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대학원 불교민속학 박사를 수료했으며,
원광대학교동양학대학원 동양학과 초빙교수로 역임하고 있습니다.
2004년 9월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칼럼 연재했으며, 지난 20년 동안 한. 중. 일 3국의 700군데
고택과, 사찰, 영지(靈地) 현장을 답사한 바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사찰기행', '방외지사', '고수기행', '조용헌 살롱',
'소설' '사주명리학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리포터: 박지선(우리들병원 C&R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