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가 1980년대 후반에 씌어진 것인데 10여 년 동안에 바뀌어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가령 50억 인구가 아니지요. 작년 이맘 때부터 세계 인구가 60억이 되었습니다. 서울도 천만이 아니라 천 이백만이 넘어섰지요. 1980년대 중반에 우리의 경제 현실을 그린 겁니다. 그 당시는 군부독재가 무르익을 무렵인데, 군부독재에 수반되는 사람이 이천억을 부정축재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요. 작년인가 독일의 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 수상이 부정한 돈을 처분했다고 해서 수상에서 퇴장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헬무트 콜 수상이 쓴 돈이 우리 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몇 천만 원 정도입니다. 아주 가소로운 액수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우리 나라가 독일보다 선진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경유착이 막 제도화되었던 때의 이야기이고, 지금도 정경 유착이나 부정부패의 고리 같은 것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집권기간 동안 한밑천 장만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합니다.


결국은 권력과 돈을 거머쥔 20% 미만의 지배계층이 나머지 80%의 서민 대중을 좀팽이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공적 자금을 조성한다든가 할 때 결국 좀팽이들의 혈세와 노동으로 만드는 것이지 뭡니까. 그 맨 아래의 80%의 보병들이 달려가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대표적인 좀팽이입니다. 제가 시를 한 편 쓰면 3만원에서 5만원 정도를 받는데 어떤 때는 못받습니다. 왜냐하면 '출판사의 사정으로 인해서 이번에는 드릴 수가 없으니 너그러이 양해하십시오.'라는 사연이 적힌 편지를 대신 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좀팽이입니까. 아마 저나 여러분들이나 다 선량한 좀팽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좀팽이들이 많아져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팽이처림]이나 [노동절] 같은 시는 우리 나라의 경제적 현실을 다루고자 했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모양이다. 그들 가운데는 내가 아는 얼굴도 많다.

장악원장 할아버지는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누하동 할머니는 끊어진 전구를 양말 속에 넣고, 구멍 뚫린 뒤꿈치를 깁고 있다.

정치에서 손을 뗀 뒤부터, 아버지는 옛날 책력을 뒤적거리거나, 앞뜰 채마밭을 가꾸며 소일한다. 큰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쌀을 떠내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직도 광 문 앞에 쓰러져 있다. 누님은 큰절을 되풀이하며, 자꾸만 지장보살을 되뇌인다.

시역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김구 선생과 교수형을 당한 죽산의 데드 마스크도 보인다. 사일구 때 죽은 친구들이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왔다갔다 하고, 분신 자살한 투사들은 중화상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처럼 한밤중에는 우리 집안이나 마당뿐만 아니라, 서울과 시골, 산과 들, 강과 바다가 온통 죽은 이들로 가득차 있어 이들을 피하여 발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가기는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어둠 속 걷기] 전문


돌아보면 20세기 한국의 역사가 죽음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국권찬탈에서부터 시작해서 2차대전 한국전쟁, 남북대립에 따른 여러 가지 분쟁, 군부독재, 자기의 인생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죽지 못한 사람들이 중음신(中陰身)으로 허공을 떠돈다고 합니다. 우리의 암담한 어둠의 역사를 제가 형상화해본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둠 속을 혼자서 걸어가시면 힘들 겁니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죽은 이들의 혼령이 여러분들의 발을 막고 있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봄에는 연록색 물결 북쪽으로

북쪽으로 펴져 올라간다

철조망도 군사분계선도 거리낌없이

북상한다

산맥을 넘고

들판을 지나서

진달래도 개나리도 월북한다

여름이면 뻐꾸기 노래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어디서나 똑같다

가을에는 황금빛 물결 남쪽으로

남쪽으로 퍼져 내려온다

비무장 지대도 민통선도 거리낌없이

남하한다

강을 건너고

계곡을 지나서

코스모스 단풍도 월남한다

겨울이면 시원한 동치미 맛

얼큰한 해장국 맛

어디서나 똑같다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하나로

하얗게 뒤덮는 눈보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동서남북] 전문


이것도 제가 80년대 중반에 쓴 시입니다. 남북의 분단과 그에 따른 비극을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제 나름대로 자연의 형상에 의탁해서 그려본 작품입니다. 인간이 이 지구를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여러 가지 나쁜 짓을 많이 했고 또 나쁜 것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을 두 개 든다면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일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나쁜 구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반세기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고생해 왔습니다. 이제 남북관계가 순리적으로 해결될 기제를 찾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가령 어떻게 통일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자연 현상을 보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철조망이나 지뢰로 막을려고 하는데, 그것이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막을 수 없게 되겠지요.


일년에 한 번쯤 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하여

저렇게 커다란 정문을

한가운데 만들어놓고

열두 명의 수위가 밤낮으로 지킨다

<정문 사용 금지>

보통사람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저 으리으리한 정문을 보아라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게 열려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닫혀 있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있는

드나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로막기 위해서 있는

저것은 우리에게


문이 아니라

벽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저 벽을

허물어뜨리자

아무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대리석 계단을

없애버리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화강암 기둥을

뽑아버리자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저 육중한 쇠문을

부숴버리자


그리하여 없애버리자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저 큰 문을

없애버리고 차라리

거기에다 벽을

만들자

그리고 그 벽에다

새로 문을

만들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문을 만들자

-[새 문] 전문


이 작품은 제가 쓴 시 가운데 가장 구호적인 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고급 관청에 청사의 정문이 문민정부 이후에는 모든 사람의 출입이 개방되었는지는 몰라도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은 우단을 깔아놓은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이나 장·차관까지만 드나들고 그랬습니다. 그걸 보고 착상을 얻어서 쓴 시입니다. 말하자면 억압체제를 타파하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읽었던 [밤눈]이라든가 아주 친밀한 개인적 내면을 토로한 시에 비하면 이러한 구호적인 시는 비록 여기에 나와 있는 시적 자아가 1인칭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집단의 제언으로 된 경우입니다.


제가 쓴 시가 이러한 시 쪽으로 발전해 왔다고 말씀드리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시도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따름입니다. 오히려 제가 간접적인 암시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정치 시는 제 초기 시에 오히려 많습니다. [어둠 속 걷기], [동서남북], [새 문] 같은 것은 우리가 살아온 정치적 현실에 대한 증언이요 형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로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 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늙은 소나무] 전문


우리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났고 죽어서는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연과 인간을 마치 전혀 관계없는 별개의 존재로 생각하고 공존하기는커녕 자연을 정복한다고 말하고 또 무자비하게 자연을 파괴해왔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어떤 인위적 조치로 깨뜨릴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연 생태를 보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 생태 보존이나 환경보호를 위해서 해야할 일은 어떤 인위적 현실적 처방보다는 자연의 질서나 섭리를 존중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막힘없이 분방한 중얼거림에 시의 새 지평이 최근에 와있는 지점이라고 할까 최근에 우리의 현대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위상 같은 것을 쓴 시를 한 편 읽어드리면서 저의 말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1998년 비교적 최근에 나온 저의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시집에 대한 생각을 최근에 피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