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_book(300_199)

         

        
        
        
        남궁벽
        
        풀, 여름 풀
        요요끼(代代木)들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삽붓삽붓 밟는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면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북돋아 주마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나 내나 우리는 
        불사(不死)의 둘레를 돌아 다니는 중생이다.
        그 영원의 역정(歷程)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삽붓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삽붓 밟아 주려무나.
        
         
        
         
        
                          
        별의 아픔 . 남궁벽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어린 아이가 뒹굴을 때에
        감응적으로 깜짝 놀라신 일이 없으십니까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지상의 꽃을 
        비틀어 꺾을 때에
        천상의 별이 아파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생명(生命)의 비의(秘義) . 남궁벽
        
        부슬거리는 봄비 속에
        우산(雨傘)을 받고서
        인왕산(仁王山)에 올랐다
        우산(雨傘)받은 채 웅크리고 앉아
        
        비어져 나오는 풀싹을 들여다보며
        호올로 조용히
        생명(生命)의 비의(秘義)를 느끼다
        
        풀은 산 물종(物種)
        산 풀을 만들어내는 대지(大地)
        대지(大地)도 역시 산 것이 아닌가
        
        검은 흙에서 파란 풀이 난다
        만물(萬物)을 생장(生長)케 하는 대지(大地)의 힘
        그 위대(偉大)한 힘은 어디로부터 오나
        
        물, 구름, 비는 삼위(三位)요 일체(一體)다
        물이 구름되고 구름이 비 된다
        그러나 그 실체(實體)는 `하나'이다
        빗방울이 땅에 내려와서
        풀잎과 흙덩이를 톡톡 때린다
        이렇게 순환(循環)하고 이렇게 때리는 것도
        산 대능자(大能者)의 조화(造化)로 되는 것이 아닌가
        
        `생'을 내어놓고
        우주(宇宙)를 생각지 말 것이다
        우주(宇宙)는 산 것이다
        우주(宇宙)의 근원(根源)은 `생(生)'이다
        
        
        
        
        남궁벽 (南宮璧 1894∼1922) 평북 출생 호는 초몽(草夢). 본관은 함열(咸悅).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남궁훈(南宮薰)의 외아들로 1912년 서울 한성고보(漢城高普)를 졸업했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협회 간사(幹事)를 지내다가 귀국하여 오산중학(五山中學) 교사를 지냈다. 14세 때, 당시 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한 애국설(愛國說, 1907)을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발표했고 일본에 있을 때 《폐허(廢墟, 1920)》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간호에 <흙이여 기름져라/풀이여 싹나거라/폐허여>로 시작하는 《자연(自然)》을 발표했으며 직접 편집한 2호에는 《풀(1921)》 《생명의 비의(秘義, 1921)》 《대지의 생명(1921)》 《대지의 찬(讚, 1921)》 등의 시와 《페허잡기(廢墟雜記, 1921)》 《편집여록(編輯餘錄, 192l)》, 오상순(吳相淳)의 인상기 《내외양면의 인상(1921)》 등을 발표했다. 천재시인으로 촉망받았으나 28세로 요절했다.

           남택상 /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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