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 [雙峰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윤(道允)이 창건하고
자신의 도호(道號)를 따 쌍봉사라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
그후 고려 시대인 1031년(문종 35) 혜조국사(慧照國師)가, 공민왕 때는 관찰사 김방(金倣)이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을 1628년(인조 6년)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 
1667년(현종 8)·1724년(경종 4)에 계속 중수하였다.

사찰 경내에는 국보 제57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보물 제163호인 쌍봉사 대웅전, 
보물 제170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浮屠)로, 그 시대의 부도 중 최대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대웅전은 평면이 네모 반듯한 3층 전각으로 
목조탑파(木造塔婆)의 형식인 희귀한 건축물이다. 철감선사탑비는 귀부(龜趺)와 이수(?  首)만 남은 무신비(無身碑)이다.



쌍봉사 초입의 담장 그리고 은행나무




해탈문 앞의 연못


해탈문


쌍봉사  대웅전 (행주형 = 범주형 - 배나가는형  대웅전은 돗대를 상징)
보물 제163호.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서, 목조탑파 형식을 유지한 희귀한 건축이다.
제일 위의 3층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1962년에 실시된 해체·복원공사에서, 
그 원래의 형태는 보통 탑파건축과 같은 사모지붕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각층마다 옥신은 4면이 한 칸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1층 1변이 4m, 2층은 3.3m, 3층은 2.6m이며,
2층과 3층에서는 옥신 높이가 극도로 줄어들어 벽체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뱀包)들은 2·3층은 2출목(二出目), 초층은 3출목(三出目)이며,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초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그러나 2·3층은 통층(通層)으로 되어, 그 중심에 심주(心柱) 하나가 있는데, 
각층 지붕의 춘설(春舌)들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1962년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724년(경종 4)에 삼중창(三重創)하였을 때의 상량문이다. 
이중창(二重創)에서 삼중창에 이르는 기간은 30여 년에 불과하고, 
삼중창은 부분적인 중수공사(重修工事)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이 건물은 1690년(숙종 16) 이중창 때에 세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4년 4월 불타버리고 말았으며, 그후 복원하였다.



극락전

범종각


경내의 느티나무



경내 전각과 전경




















부도전


철감선사 부도비에 오르는 길




철감선사탑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 만이 남아 있으나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청년거북처럼 매우 씩씩하고 기운찬 모습으로 거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있다. 
보물 제 170호이다


철감선사탑비
대웅전 뒤 왼편으로 이어진 대숲을 돌아난 오솔길을 오르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부도의 기본  양식인 
팔각 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세부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장중하다. 부도 높이는 2.3m이고 국보 제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 황지우의 詩  "상실"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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