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선 연가

밥그릇이 높으면
생일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회초리는
빈 쌀독 같은 두려움이었어

어깨가 뒤뚱거릴 만큼
책가방이 무거울 때
매달 확인해야 했던 성적은
절벽같은 아찔함이었고

내 키를 훌쩍 넘긴 아들
꼭 맞는 쪽빛 운동화 손에 쥐었다
찢어진 돼지 저금통이 생각날 땐
변심한 연인과 헤어진 밤
기울이는 술잔처럼 비참하였지

하얀 싸리꽃비 내리던 날

한 평생 살다보니
두려움보다 비참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리운 이 다시 볼 수 없는
당신의 눈꺼풀이라며
버섯꽃 까맣게 가슴에 피우다
쓸쓸히 북쪽을 향해 차갑게 누워 버린
내 아버지

그래,
이제 알겠더라
내 가슴에 그대를 담아보니 이제야 알겠더라

글/김영인

♪ 파초선(芭蕉扇)연가 - 낭송 고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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