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넓이와 깊이] (펌)



김광규 (시인)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시절, 저는 이 캠퍼스에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40년 전의 일로, 저는 60학번이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여기에 와 근처를 거닐어 보았습니다. 마로니에 교정이 옛날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마당에서 젊은이들이 농구를 하늘 걸 보니, 마로니에 그늘에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났는데, 그때 학생들이 이 마로니에 마당에서 대오를 정비하여 스크럼을 짜고 밖으로 나갔었습니다. 또 길 건너에 학림다방이 있는데 그 다방도 굉장히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가 학생 시절에 강의를 빼먹고 거기에 가 앉아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곤 하던 곳입니다. 거기에도 잠깐 들러서 커피도 한 잔 마셨는데, 옛날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고 커피 값만 올랐더군요.


바로 그 학림다방에서 학생 시절에 동급생이던 소설가 김승옥, 이청준, 박태순, 이런 사람들이 써온 글을 서로 돌아가면서 읽어 보고, 그 글을 신춘문예라든가 [사상계]지에 투고해서 화려하게 데뷔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의 유적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이 여러분이 앉아 있는 문예진흥원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그 당시에는 문리대 행정본부였습니다. 그 건물의 내부는 바뀌었겠지만 외양은 옛날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건물에 와서 등록금을 냈습니다. 지금은 대학의 등록금을 은행에서 지로로 내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줄을 서서 이 건물의 창구에 냈는데, 길게 늘어선 줄 탓에 한번 내려면 여간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을 내고 나면 이제 한 학기가 갔구나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또 개중에는 등록금을 까먹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등록금을 타와서는 정작 등록을 하지 않고 용돈으로 써버리고 마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런 친구들이 다 크게 출세를 했더군요. 모범생 친구들은 샌님이 되고, 그런 사람이 정계의 거물이 되었으니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일 수밖에요.


제가 60학번으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4·19가 일어났는데, 워낙 데모라는 게 1학년이 앞장서게 되어 있어서 곤욕을 치루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당시에 우리 나라에 비틀즈의 노래가 처음 들어왔었습니다. 또 중남미의 보컬 그룹이 부른 루나 레나, 즉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는데, 제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다음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이 시가 오랫동안 4·19세대의 만가(輓歌)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4·19세대는 이제 많이 늙었지만 20세기 후반기의 우리 사회를 움직여 왔고, 우리 나라의 오늘이 있게 하는 원동력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4·19세대는 대략 일제 시대 말기에 출생했습니다. 제가 41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다섯 살에 해방이 된 셈입니다. 네 살 무렵의 첫 번째 남는 기억으로는 배고픔입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쌀 등을 마구 공출해 가는 통에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쌀 대신 무죽을 먹고 그랬는데 어렸을 때 배고팠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해방을 맞아서도 그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그로부터 5년 후인 10살 무렵, 6·25 동족상쟁이 일어나 멋모르는 피난길에서 배고픔과 전쟁의 공포 등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 후에 초등 교육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제의 교육은 받지 않았습니다. 한글로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가 우리 4·19세대일 겁니다. 그래서 '한글 일세대'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외국문학을 공부할 때 가령 일본어 번역서를 읽을 줄 모르니까 영어, 독일어, 불어에서부터 직접 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국문학을 직수입하여 번역을 하고 그 외국문학의 영향을 우리 나라에 받아들인 첫 번째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마로니에 그늘에서 불태우던 열정을 생각하며>


4·19는 순수한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 민주주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들고 일어나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정복시켰고, 1960년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 나라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의거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혁명이라고 격상되었지요. 학생들이 나가서 피를 흘리고 해서 얻어진 혁명이지만, 사실 그렇다면 혁명의 주체가 정권을 잡아야 완성된 혁명인데 그렇진 못했고, 시위가 끝난 다음 우리는 거리를 쓸고 청소하고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굉장히 순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대학에서 학생회장 정도 하고 나면 다들 국회의원들이 되고, TV의 토크쇼에 나와서 얼굴 좀 팔리면 정치인으로 나서는 걸 심심찮게 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굉장히 순수했다고 믿습니다. 그 이후에 군사독재가 한 30년 간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는 5·16 , 유신 독재,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짓밟은 신군부의 등장을 겪으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우리는 또 30여 년을 병역관계로 복무를 했습니다. 학생시절에는 학도호국단으로 군사훈련을 받았고, 그 당시에는 병역이 정확히 36개월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향토예비군이라는 게 생겨서 그걸 또 했고, 그 다음에는 민방위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 또래들은 만 50세가 될 때까지 군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군복을 벗고 조금 있었더니 IMF가 덮쳤습니다.


50대 후반이 되어 이제 겨우 생활을 즐기려고 할 때에 조기 정년퇴직 해당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4·19세대가 아주 불행한 세대입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비극적 사건을 한몸에 겪고 살아온 불행한 세대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군들 자기 세대가 행복하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대학로를 걷다보니까 4·19 시대 생각이 나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쓰기는 1978년에 써서 79년에 발표를 하려고 했는데, 부산 동래의 하숙방에서 쓴 참담한 고백인 이 시는 1979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대통령 시해사건에 뒤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탄압 조치로 이 계간지가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와 함께 폐간됨으로써 발표의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지금 읽어보면 별 게 아닌데도 제 시도 그 당시에는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제 개인 시집에 실릴 수 있었지요.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지금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4·19세대의 만가의 작품의 현장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좋은 시는 내면과 현실을 함께 반영한다>


시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개인의 내면과 또는 사회 현실을 형상화한다든가 또는 반영하는 문학장르입니다. 그래서 아주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가 시인과 독자, 둘로 나누어 본다면 시인은 무언가 발신(發信)을 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고, 독자는 그것을 수용해서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발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되도록 자기가 보내는, 말하자면 전파라면 그 전파가 넓게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수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넓이가 거기에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넓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진폭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 힘이 작용하는 자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수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전파를 자기가 수신해서 개인적인 공감의 편차는 있지만, 그 깊이를 아주 깊숙이 느끼는 사람도 있고, 또는 피상적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강연자와 청중으로 만났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저의 문학 세계의 넓이를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보여드리고, 그 다음 여러분이 거기에서 어떠한 깊이를 느끼는가 하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은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꾼이라면 우리는 먼저 소설가를 들 수 있습니다. 소설가야말로 아주 장강(長江)과 같이 길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풀어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소설가와는 배척적인 지점에 시인이 있을 것입니다. 시는 대개 긴 소리를 못합니다. 외마디 소리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시인은 우리 옛말로 하면 소리꾼이라고 볼 수도 있고 가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나라의 옛날 소리꾼이나 가객의 무대는 판소리 마당이었는데, 거기서 소리꾼이 아주 멋들어지게 창을 하고 그 사이사이를 이어 주는 아니리와 추임새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서구에서 발달한 오페라도 마찬가지죠. 영창, 아리아라고 해서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또 대사를 읊듯이 말을 하는 서창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영창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시를 읽어드리고 그 사이사이에 서창처럼 추임새를 넣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영산(靈山)]이라는 시는 1975년 발표작으로 저의 데뷔작입니다. 1975년 {문학과 지성}이라는 계간지에 처음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네 편 중의 하나가 [영산]이라는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영산(靈山)] 전문


영산이라는 말은 불교의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나오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영혼에 잠재해 있는 어떠한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영산이라고 붙였고, 나중에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될 때도 영혼의 산이라고 직역이 되었습니다. 문학에 대한 제 나름의 이상과 삶의 현실 그것을 영산으로 형상화했고, 영산을 찾아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현실을 대조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의 오랜 꿈과 이상과 자아를 영산을 통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상실해 버린 다음에 다시 그것을 찾는 작업에서 제 나름대로 제가 추구하는 문학의 정신을 표현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없어진 영산을 다시 찾는 작업을 다른 시편에서도 많이 되풀이했습니다. 가령 시중 [크낙산의 마음]이라는 것도 있는데, 크낙산도 제 시의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크낙산이 어디에 있는 무슨 산이냐고 질문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도 이름을 그냥 붙인 산이니까 큰 산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크낙새가 사는 산이 아니고 큰 산. 그래서 큰 산을 찾아가는 작업을 하다보니 큰 산이 꼭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나 자기의 마음 속에서도 자꾸 솟아오르고 태어나는 산이라고 몇 번에 걸쳐서 제 시 속에서 변형시켜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저는 서른다섯 살 때 아주 늦깎이로 시인으로 데뷔했습니다. 제가 첫 번째 발표한 네 편의 시 데뷔작 가운데서 지금 이 [영산]은 제가 문학적으로 추구해야 할 어떠한 내용이나 주제라고 할까 이런 것을 자기의 문학적 지표를 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와 함께 [시론] 이라는 시도 발표했는데, 시론이라면 시의 이론 아닙니까. 시의 이론은 사실 시로 쓰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첫 번째 데뷔작으로 [시론] 이라는 시를 썼는데, 그를 통해 제가 찾고자 하는 어떤 시적 형식에 관한 저의 지표를 나타낸 바 있습니다.


겨울밤

노천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밤눈] 전문


1988년에 나온 '좀팽이처럼' 이라는 시집에 실렸습니다. 시라는 것이 개인적인 독백에 의한 예술이 아닙니까. 개인적인 사적인 체험, 또는 감정, 감정의 대표적인 게 사랑일 겁니다. 사랑에 대한 체험이라든가 사랑의 기쁨, 슬픔, 욕망, 좌절 등을 쓴 시를 보통 연애시, 사랑시라고 말하는데 저는 늦깎이로 데뷔를 해서 사랑시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발표한 5백여 편의 시 가운데서 이게 유일한 사랑시일 겁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사랑시가 강남의 어느 카페에 걸려 있다고